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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70
한자 高錫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7년연표보기 - 고석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고석주 일본 경찰에 피체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31일 - 고석주 광주 지방 법원 군산 지청에서 유죄 판결 받음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30일 - 고석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언도받음
활동 시기/일시 1919년 6월 12일 - 고석주 고등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확정 투옥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고석주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17년 11월 2일 - 고석주 대전현충원 안장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 3·1 운동 발발
출생지 고석주 출생지 - 전라북도 군산시
활동지 고석주 활동지 - 전라북도 군산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영명 학교(永明學校) 교사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옛 옥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고석주는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가담하여 거사준비를 하고 영명학교 학생과 개정 병원 직원과 합세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활동했다.

[활동 사항]

고석주는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한인 단체인 자강회, 협성회, 국민회 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 고취와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보, 합성신보, 신한민보 등의 언론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Korean Day School의 한문교사와 한인중앙학교 교사로서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6년 6월 귀국하여 옥구[현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영명 학교(永明學校)[현 군산 제일 중·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보낸 독립 선언서가 동료 교원에게 전해지면서 동지들과 의논한 끝에 독립 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각 방면으로 연락하여 군산(群山) 장날인 3월 6일에 만세 운동을 하기로 계획 추진하였다.

그런데 만세 운동 전날 운동 계획이 발각되어 주동 교사들이 연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계획 보다 하루 빠른 3월 5일 군산에서 학생과 주민, 예수교 신도 등 500여명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학생들에 의하여 태극기가 나뉘어지고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또한 만세 운동에 참가한 시위대 일부는 경찰서로 가서 구속된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시위와 석방 요구에 일본 경찰과 군인들은 주동 인물의 체포와 군중을 탄압하고 강제해산하면서 영명 학교 및 예배당을 수색하게 되었다. 이때 영명 학교에서 독립 선언서 2,000여 장이 발견됨에 따라 고석주는 송정헌(宋正憲)·양성도(梁成道)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고석주는 1919년 3월 31일 광주 지방 법원 군산 지청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4월 30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6월 12일 고등 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감 이후에도 학교와 교회에서 민족 의식 고취에 힘썼으며, 충남 서천 판교면에 교회를 개척하여 계몽운동과 농촌운동을 펼쳤다. 1937년 7월 17일 판교면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2017년 11월 2일에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3권(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1)
  • 국가 보훈처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7.29 활동 사항 및 추모 현황 업데이트 요청 활동 사항 및 대전현충원 안장 사실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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