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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64
한자 姜文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구희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9년 9월 28일연표보기 - 강문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1925년 - 강문주 의군부 군자금 모집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45년 3월 13일연표보기 - 강문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 - 강문주 대통령 표창 수여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강문주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거주|이주지 강문주 거주지 - 전라북도 군산시
활동지 강문주 활동지 - 전라북도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개설]

강문주는 1919년 의군부에 가입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했다. 그리고 1921년 이래 전북 지방에서 지하 조직을 조직하고 조직된 지하 조직을 통해 임시 정부와 연락을 취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전달하였다.

[활동 사항]

강문주가 가입한 의군부는 동년 4월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현규(金鉉奎) 등이 동만주 연길현(延吉縣)에서 조직한 항일 무장 투쟁 단체였다. 의군부는 조직을 본부와 중부(中部)로 나누어 본부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에 김현규가 선임되었으며 중부는 참모장 고평(高平)을 중심으로 서무·재무·외교·통신·군법·헌병·군의 등 부서가 있었는데 강문주는 군의 감독을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중부 조직은 항일 전투 활동의 중심 세력으로서 5개 대대의 예하 병력을 거느리고 본부와 유기적 연락을 취하면서 화룡·왕청·혼춘 일대의 일제 세력 및 일본에 협력하는 세력을 격퇴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지방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뒤이어 습격한 일본군과도 치열한 격전을 폈다. 이후 의군부는 본부와 중부의 병력을 통합하여 군세(軍勢)를 확충하고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와 협력하며 대일 항쟁을 계속하였다.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 당시에는 북로 군정서·대한 독립군과 함께 작전 구역을 분담, 일본군을 협공·섬멸하는데 기여하였다. 청산리 전투 후 노령(露領) 방면으로 이동한 의군부는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自由市慘變)의 수난을 겪었으나 군용을 재차 정비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 되었으며,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1972)
  • 국가 보훈처 공훈 전자 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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