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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1148
한자 李根榮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재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0년 5월 10일연표보기 - 이근영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31년 - 이근영 서울 중동 중학 졸업
수학 시기/일시 1934년 - 이근영 보성 전문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33년 12월 2일~3일 - 이근영 『동아 일보』에 「모의 재판에 대한 관견」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이근영 동아일보사 사회부 기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34년 6월 10일~7월 4일 - 이근영 『동아 일보』에 「전쟁 금지에 관한 조약」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5년 10월 - 이근영 『신가정』에 「금 송아지」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6년 3월 - 이근영 『신가정』에 「과자상자」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6년 6월 - 이근영 『신동아』에 「농우」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6년 11월 - 이근영 『조선 문학 속간』에 「말하는 벙어리」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7년 10월 20일 - 이근영 『동아 일보』에 「렌스에 비친 가을의 표정」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8년 2월 15일~6월 26일 - 이근영 『동아 일보』에「제 3 노예」 연재
활동 시기/일시 1939년 1월 - 이근영 『비판』에 「당산제」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9년 7월 - 이근영 『문장』에 「이발사」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39년 11월 5일~8일 - 이근영 「영화 ‘새 출발’을 보고」를『동아 일보』에 게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월 - 이근영 『문장』에 「해산과 추첨」 게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3월 3일~10일 - 이근영 「나의 잡기첩」을 『동아 일보』에 게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4월 9일~5월 7일 - 이근영 「탐구의 일일」을 『동아 일보』에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0년 5월 19일~23일 - 이근영 「병상기」를 『동아 일보』에 게재
활동 시기/일시 1940년 6월 - 이근영 『인문 평론』에 「최고집 선생」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0년 10월 - 이근영 『문장』에 「고독의 변」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1년 2월 - 이근영 『문장』에 「고향 사람들」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1년 9월 - 이근영 『춘추』에 「밤이 새거든」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0월 - 이근영 『춘추』에 「소년」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3년 5월~9월 - 이근영 「흙의 풍속」을 『춘추』에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이근영 작품집 『고향 사람들』 발행
활동 시기/일시 1945년 9월 - 이근영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2월 - 이근영 『예술』에 「추억」 발표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이근영 조선 문학가 동맹 가담, 농민 문학 위원회 사무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3월 - 이근영 『인민 평론』에 「장날」 발표
출생지 이근영 출생지 -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
성격 문인
성별
대표 경력 소설집 『고향 사람들』 발표

[정의]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기까지 활동한 전라북도 군산 지역 출신 문인.

[활동 사항]

이근영은 1910년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이집찬과 어머니 고성녀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 중 큰 아들 이홍조가 큰집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고성녀는 이근영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갖은 애를 썼다. 1931년 보성전문 법학부에 입학한 이근영은 졸업과 동시에 『동아 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한다. 당시 숙명 여전을 다니던 2세 연하의 김창열과 연애 중이었다.

김창열과 결혼한 이근영은 1935년 『동아 일보』의 자매지 『신가정』에 「금 송아지」를 발표하면서 작가로 입문한다. 이어 「과자 상자」, 「농우」, 「말하는 벙어리」 등의 단편을 지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당시 이근영이 발표한 여러 글을 살펴보면 노동 운동이나 좌익 운동에 대한 관심과 제국주의·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이근영은 늑막염에 걸려 입원하고, 그 해 8월 『동아 일보』가 폐간된다. 이후 이근영은 『춘추』 편집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서울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 동맹에 가입하기도 하고 『해방 일보』의 창간에 가담하는 등 바쁘게 생활하다가 1946년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입 농민 문학 위원회 사무장직을 맡는다. 이후 월북하여 활동하였는데, 월북 시기에 관해서는 1947년 월북설과 1950년 월북설이 있다.

북한에서 이근영의 활동은 점차 언어학 분야로 옮겨간다. 상세한 자료로 확인하기 힘들지만, 1990년경까지는 살아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영은 1985년 평양 방송이 이근영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고 전하고 있다.

[저술 및 작품]

농민 문학에 대한 관심과 지식인의 현재적 삶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이근영은 다양한 작품을 썼다. 월북 이전까지 쓴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보면, 이근영의 작품은 네 군으로 나눌 수 있다. 공종구의 논의를 참고하였다.

첫번째, 부박한 소시민들의 왜곡된 욕망 구조나 지식인 사회[특히 교직 사회]의 타락상과 병리 현상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대체로 초기작에 속하는 이런 작품군에는 「금 송아지」, 「과자 상자」, 「일요일」, 「적임자」가 있다.

두번째, 궁핍한 생존 조건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는 농민들의 건강한 공동체적 정서와 순후한 심성에 대한 믿음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농우」, 「당산제」, 「고향 사람들」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군은 점차 농민들의 비참한 생존 조건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하여 「고구마」, 「안노인」으로 형상화된다.

세번째, 생활과 사상 간의 갈등으로 인한 지식인의 고뇌와 비애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말하는 벙어리」, 「탁류 속을 가는 박교수」가 있다.

네번째, 영락한 처지의 불행한 인간 군상들의 비극적 삶을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이발사」, 「최고집 선생」, 「고독의 변」, 「소년」, 「밤이 새거든」 등이 이에 속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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