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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896
한자 晋州姜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금광리|세장리|학당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진주 - 경상남도 진주시
입향지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
세거|집성지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금광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세장리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학당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강이식(姜以式)|강진(姜縉)
입향 시조 강원전(姜元鐫)

[정의]

조선 시대 전라북도 군산[옛 옥구현] 지역에 세거한 성씨.

[개설]

강원전(姜元鐫)이 15세기에 옥구현[현재의 군산시 회현면 구정리]에 입거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옥구현에 세거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진주강씨 호부사공파라고 부른다. 진주강씨 호부사공파는 고씨·두씨·문씨·전씨 등과 함께 조선 시대 옥구현의 5대 대성(大姓) 중에 하나로 꼽힐 정도로 번창하였다.

[연원]

진주강씨 시조는 고구려에서 도원수를 지내면서 수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라는 설도 있고, 고구려 멸망 이후 통일 신라 시대에 강진(姜縉)이 진주 지역의 진양후(晉陽候)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는 설도 있다. 진주강씨는 각 파마다 중시조를 달리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옥구에 입거하여 대성(大姓)을 이룬 진주강씨들은 은열공파(殷烈公派) 호부사공파(戶部事公派)이다. 은열공파의 중시조는 강민첨(姜民瞻)으로 963년(고려 광종 14)에 태어나, 1005년(목종 8)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012년(현종 3)에 안찰사로서 영일 등지에 쳐들어온 여진을 격파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거란의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강감찬의 부장(副將)으로 출정하여 흥화진에서 적을 격파하였으며, 거란군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거란군을 추격하여 자산에서 크게 이겼다. 전공으로 강민첨은 상장군에 책봉되었고, 이후 병부 상서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되었고, 시호로 은열(殷烈)을 수여받았다.

[입향 경위]

은열공 강민첨의 6세손이며 전라 어사를 지낸 어사공(御使公) 강원전(姜元鐫)은 조선 태조 조에 위사 공신에 책봉되었다. 강원전이 아홉 정승이 나온다는 길지인 옥구현[현재의 군산시 회현면 구정리(九政里)]에 입거한 시기는 태조 조에 강원전을 위사 공신에 책봉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15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강원전옥구현[현재의 군산시 회현면 대정리]에 입거한 이후 후손들이 회현면 대정리, 금광리, 세장리, 학당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입향조 강원전이 증직으로 호부 참판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을 호부사공파, 또는 어사를 지냈기 때문에 어사공파라고 부르고 있다.

[현황]

1990년에 발간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진주강씨회현면 대정리에 90가구, 금광리에 36가구, 세장리에 15가구, 학당리에 11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군산에 거주한 진주강씨의 인구 현황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옥구에 세거한 호부사공파 진주강씨 중에 과거(科擧)에 합격한 것으로 현재 확인되는 자는 강성대(姜聖大)강진문(姜進文)이다. 강성대는 1721년(경종 1) 증광시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강진문(姜進文)은 1583년(선조 16) 별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효자로는 강응원(姜應元)과 강이무(姜永武)가 유명한데, 이들은 부자 사이로[각각 강원전의 14세손과 15세손이다.] 대를 이어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다. 이에 지역 유림들이 1931년에 이들의 효행을 기리며 세운 효자비가 회현면 대정리 서기 부락에 세워졌다.

[관련 유적]

군산 지역의 진주강씨와 관련된 유적은 회현면 학당리에 있는 강원전의 제실인 영모재(永慕齋)와 진주강씨 호부사공파 세천비(世阡碑), 대정리 서기 부락에 있는 강응원(姜應元)과 강이무(姜永武) 부자(父子)의 효자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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