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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895
한자 濟州高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임피면|대야면
집필자 김두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 시기/일시 12세기 중엽 - 고돈겸(高惇謙), 오식도로 유배
입향지 오식도 - 전라북도 군산시 오식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옥구·옥산·임피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면 지도보기, 옥산면지도보기, 임피면지도보기 일대
묘소|세장지 제륜산 일대 -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동 지도보기 군산 수원지 옆
성씨 시조 고을나(高乙那)
입향 시조 고돈겸(高惇謙)

[정의]

고려 시대 및 조선 시대 군산 지역에 세거한 성씨.

[개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군산에 세거한 제주고씨들은 모두 제주고씨 문충공파이다. 제주고씨 문충공파의 입향조는 고돈겸이다. 고돈겸이 12세기 중엽에 중앙의 고위 관리로 있다가 다른 관리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고 오식도로 유배된 것이 계기가 되어 고돈겸과 후손들이 군산 지역에서 세거하였다. 제주고씨들은 고려 시대에 9명의 상서(尙書)가 나올 정도로 번창하였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직후에는 사직공파와 참의공파로 분파되었다.

[연원]

제주고씨(濟州高氏)는 탐라국 개국 설화에 나오는 삼성혈(三姓穴)에서 탄생하였다고 하는 고을나(高乙那)를 시조로 삼고 있다. 고려가 건국하자 고을나의 45세손 고자견(高自堅)의 태자 고말노(高末老)가 고려 태조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이에 고려 태조고말노에게 성주(星州)의 칭호를 주었다. 이후 고말노의 세 명의 아들 고유(高維), 고강(高綱), 고소(高紹)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면서부터 제주고씨가 육지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고말로를 중시조로 모시고 제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입향 경위]

제주고씨는 탐라국 45세손 고자견의 태자 고말노의 후손 중에 고돈겸(高惇謙)[제주 고씨들이 편찬한 족보에 의하면 고말노의 7세손이라고 한다.]이 12세기 중엽에 중앙의 고위 관리로 있으면서 직언을 하다가 다른 관리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고 오식도로 유배되었다가 유배가 풀리지 않자 계속 머물게 되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돈겸의 후손들이 옥구와 임피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제주고씨들이 편찬한 족보에 고돈겸(高惇謙)이 아니라 고순겸(高淳謙)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아들인 고형중(高瑩中)의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고형중의 부(父)가 고돈겸(高惇謙)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후부터는 이름을 고돈겸(高惇謙)으로 정정하였다고 한다.

[현황]

제주고씨는 고려 시대에 군산 지역에 거주하면서 중앙의 고위 관직자를 줄곧 배출한 벌열 성씨였다. 고돈겸 부터 고려 말 조선 초에 생존하였던 고돈겸의 9세손 고인충고의충 형제까지 중앙의 고위 관직자를 끊이지 않고 연이어 배출하였다. 특히 고려 시대에 군산에 세거한 제주고씨들은 9명의 한림원 학사들을 배출한 것으로 유명한데, 제주고씨가 세거한 마을을 한림동이라고 명명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였다.

고려 시대에 옥구에 입거한 고돈겸의 후손들이 모두 옥구에 거주하지는 않았다. 옥구에 거주한 사람이 타관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사람보다 훨씬 적었다. 또한 장자가 옥구에 거주한 경우보다도 장자가 아닌 다른 아들이 아버지의 거주지를 이어서 계속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아들뿐만 아니라 딸들도 혼인이나, 제사 및 재산 상속에 동등하게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자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가 확립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후기였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옥구에서 태어난 제주고씨들은 외가나 처가로부터 재산을 받은 곳으로 장자와 차자를 가리지 않고 거주지를 이동하였다.

고돈겸의 8세손 고영손[1351-1413]에게는 고인충고의충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두 아들의 생존 시기는 아버지의 생졸 연도로 보아,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된다. 그런데 큰 아들 고인충은 옥구에 세거하지 않고 처가가 있는 고산(高山)[현재 완주군 고산면]으로 이주하였다가 현손인 고덕령(高德齡)이 어머니 광산 김씨를 모시고 다시 임피로 이주하였다. 이후 고덕령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임피 지역에서 대성을 이루었다. 둘째 아들 고의충과 그의 후손들은 옥구에 세거하면서 옥구의 대성을 이루었다. 곧, 제주고씨는 군산의 옛 지역인 옥구와 임피 두 지역에 수백 년 동안 세거하면서 수많은 씨족 구성원들을 배출하였다. 옥구에 세거한 제주고씨들이 진출한 관직은 조선 전기에는 고려 시대에 비하여 그 위계가 낮아졌다. 곧, 중앙의 고위 관직이 아닌 중하위 관직이나 지방 관직에 주로 진출하였다. 이에 타관으로의 거주지 이동 양상도 변화되었다. 그 규모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동 거리도 짧아졌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직 진출자들이 조선 전기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장자 위주의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확립되면서부터 옥구에 거주한 제주고씨들이 타관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경우는 매우 적었다.

제주고씨 중에 조선 시대 문과 급제자나 사마시 합격자로 밝혀지는 사람은 1840년(헌종 6) 식년시 진사시에 합격한 고득의(高得義) 한 명이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관직에 진출한 제주고씨 중에 대부분은 과거가 아닌 음서나 천거를 통해서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고씨들이 편찬한 족보로 가장 오래된 것은 1725년(영조 1)에 간행된 4권 4책의 『고씨 족보(高氏族譜)』인데, 현재 원본이 서울 대학교 규장각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제주고씨들이 근년에 규장각 소장본 족보를 영인하여 보관해 오고 있다. 이 족보에는 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고씨들 뿐만 아니라 군산 지역에 세거해 온 제주고씨들도 역시 수록되어 있다.

1990년에 간행된 『옥구 군지(沃溝郡誌)』에 의하면, 당시 10가구 이상 제주고씨가 집성촌을 이룬 지역으로 옥구 지역은 옥구읍 옥정리[25가구], 옥구읍 어은리[19가구], 회현면 학당리[14가구]였고, 임피 지역은 임피면 월하리[57가구], 술산리[21가구], 서수리[20가구], 대야면 접산리[45가구]였다고 한다. 이후 군산 지역에 거주한 제주고씨의 인구 현황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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