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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경마장 폭발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57
한자 群山競馬場爆發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11월 30일연표보기 - 군산경마장 폭발사건 발생
관련 인물/단체 일본|미군|마사회

[정의]

1945년 11월 30일 군산경마장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

[개설]

일제는 1927년 가을 군산 경마 구락부 소속 미와사키[宮崎] 농지 2만 1천 평[지금의 팔마광장 부근]에 전국 최초 공식 규격 경마장을 조성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7년 당시 국내에는 공인된 경마장이 경성[서울], 평양, 대구, 부산, 군산, 신의주 등 여섯 곳뿐이었다. 경마 대회는 1년 중 벚꽃 개화 시기와 단풍철 두 차례 전국 순회로 열렸다. 그러나 1941년 가을 경마를 끝으로 중단된다.

[결과]

1941년 가을 경마를 끝으로 일제는 태평양 전쟁 말기 미군 항공기 착륙을 막기 위해 주로(走路)를 폭파해 군산경마장은 기능을 상실한다.

1945년 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이 군산경마장에 주둔하기 시작했는데, 1945년 11월 30일 보초를 서던 미군들이 추위를 피하려고 피워 놓은 모닥불에 탄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해 경마장 건물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폭발사건은 대형 화재로 이어졌고 인명과 재산피해도 엄청났다. 미군 헌병 23명, 한국 소방 경찰 7명, 민간인 3명, 의용 소방 대원 9명 등 모두 42명이 숨지고, 부상 1천여 명, 건물 전파 177동, 이재민 650여 명이 발생했다. 1961년 5월 5일 당시 강정준 의용 소방 대장과 지종환 군산 소방서장이 경마장 폭발사건 때 산화한 아홉 의용 소방 대원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새기고자 의용 불멸비를 세웠다.

폭발 사고로 폐허가 된 군산경마장은 마을 농민들이 경작료를 내면서 농사를 짓다가 1949년 6월 1일 농지 개혁법이 공포되자 농지 분배를 신청했다.

그 후 반환을 요구하는 마사회와 10년 가까이 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1954년 1월 농림부는 신중한 검토 결과 경작자에게 분배하여 농토로서 농민들이 경작하게 하도록 최후 결정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논들도 주택 단지가 되어 그 옛날 경마장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경마교(競馬橋)’ 하나만 외롭게 남아 그날의 현장을 지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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