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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귀환 노무자 보상 요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48
한자 日本歸還勞務者報償要求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종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5년 9월연표보기 - 일본 귀환 노무자 보상 요구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일본 귀환 노무자 보상 요구에 대해 미군이 ‘그 지급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삐라를 배포하고 각 처에 붙임
발생|시작 장소 군산부청 - 전라북도 군산시 중앙로 지도보기
성격 노동 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노우에|세화회|조용관

[정의]

1945년 전라북도 군산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으로 강제 징집된 노무자 1,803명에 대한 보상 요구 시위.

[역사적 배경]

1945년 9월 중순경, 1,000여 명의 한국인이 군산 부청[시청] 건물을 포위하고 이노우에[井上] 부윤에게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간 노무자 1,803명에 대해 피해 및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경과]

일본 강제 징집 노무자의 배상 금액은 한 사람에 대해 사망자 2만 원, 불구자 1만 5000원, 귀환자 3,000원, 총액 540만 원이었다.

군산부에서 배상할 수 없으니 도에 연락하겠다.”고 대답한 이노우에 부윤은 강력한 요구에 일본인을 보살피는 모임 세화회(世話会)에 의뢰하였고, 일본인들이 동요하는 가운데 군산 거주 일인과 단체들이 모금하여 지급하는 방법으로 합의를 봤다. 그러나 모금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아 10월 16일[1회분] 3만 원, 21일[2회분] 30만 원을 받는데 그쳤다.

[결과]

1945년 10월 초순 군산에 진주한 미군이 ‘그 지급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삐라를 배포하고 각 처에 붙였다. 결국, 한국인과 일본인 쌍방 대표는 미군 앞에서 대화를 가졌고, 종래의 지급금 외에 16만 5000원을 추가하여 총액 49만 5000원을 받는 것으로 손해 배상 문제를 마무리 지었다.

[의의와 평가]

노동 운동가 조용관(趙容寛)[1885~1950]의 주도하에 일어난 노무자 퇴직금 요구와 귀환 노동자 피해 보상 요구를 관철한 것은 군산이 항구 도시로 항만 노동 조합이 일찍 조직되었고, 탄압 속에서도 노동 운동이 치열했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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