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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소·미선공 파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537
한자 精米所米選工罷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6년 11월 8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1차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26년 11월 29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1차 파업 종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7년 6월 19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2차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27년 6월 24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2차 파업 종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9년 10월 21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3차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29년 10월 21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3차 파업 종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12월 14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4차 파업 시작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4년 1월 16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5차 파업 시작
종결 시기/일시 1934년 1월 19일연표보기 - 정미소·미선공 5차 파업 종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5년 8월 1일 - 가등 정미소를 제외한 조일 정미소·조선 정미소·육석 정미소 등 정조 품귀로 휴업
성격 노동 운동
관련 인물/단체 군산 정미 인접 노동 공동 조합|군산 미선회|조선 노동 공제회|조선 노동 연맹회

[정의]

1924년 이후 1930년대 중반까지 군산 지역 정미소 매가리공과 미선공(米選工)들이 일본인 공장주들에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각종 파업.

[개설]

일제 강점기 군산에는 조일(朝日)·조선(朝鮮)·낙합(落合)·육석(陸石)·장전(長田)·전전(前田)·반전(半田)·품천(品川) 정미소와 같은 크고 작은 정미소들이 1910년 이후 계속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군산에 정미소가 설립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인근 지역에 대형 농장들이 많았고, 각지에서 생산된 미곡의 최종 집결지로서 수출 직전 가공하기 위한 시설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미소에는 일본인 공장주와 한국인 노동자들이 매가리공과 미선공으로 종사하고 있었는데, 생산과 관련된 힘들고 어려운 일은 한국인 노동자가 대부분 담당하였다. 정미소에 종사하는 노동자 수는 많은 경우 대략 1,000명 이상 있었다.

그런데 고용 상황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정미소에 새로운 탈곡 기계가 들어오면 그들은 해고 대상이 되었으며,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한 경우에는 노동자들만 일방적인 임금 인하로 그 어려움을 감당해야만 했다. 또한 공장주들의 폭언·구타와 차별적인 대우는 이들의 원망만 키우게 되었다.

이에 정미소 직공들은 군산 정미 인접 노동 공동 조합(群山精米籾摺勞動共同組合)·군산 미선회(群山米選會)와 같은 노동 운동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일본인 공장주와 투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들의 초기 투쟁은 임금 인하 반대와 임금 인상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정미소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파업 참가자가 많아지면서 일본인 공장주로부터 차별 금지, 단체 교섭권 확립, 노동 시간 확립 등과 같이 요구 조건도 폭을 넓혀갔다.

정미소 직공들의 투쟁은 1924년 3월 16일 군산 지역 최초의 미선공 연대 파업인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의 파업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가등·조일·조선·육석·장전 정미소 등 군산 지역 모든 정미소를 대상으로 1930년 중반까지 진행되었다. 정미소 직공들의 파업에 대항하여 일본인 공장주들은 경찰을 동원하여 관련자를 검거하거나 대체 인력 투입, 시간 끌기 등과 같은 방법을 취하여 파업을 방해하였다. 그렇지만 정미소 직공들은 일본인 자본가의 부당한 대우와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연대 파업의 규모를 넓히거나 별도의 조직대를 결성하여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초인 1910년대 노동 운동은 노동자들이 질적·양적으로 충분하지 못하여 노동 운동을 이끌어 갈 주체 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민족적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이기는 하였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노동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에 따른 노동 조직의 발전과 함께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 독점 자본의 진출이 늘어나고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면서 전국 각지에 노동 조직이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노동 공제회, 조선 노동 연맹회 및 각 직업별 노동 조합이 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들 단체는 전국의 크고 작은 노동 운동에 동참하며 노동자의 권익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 당시 투쟁은 공업 시설이 치중되었던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기도에서 주로 일어났다.

군산 지역에서도 위와 같은 노동 운동의 모습이 일본 독점 자본의 진출과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 군산은 호남과 충청남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의 집산지이자 일본으로 이출되는 중요한 장소였다. 군산에 집산된 쌀을 처리하기 위한 근대적 시설을 필요로 하였고, 정미소·미곡 창고·농장·화물 하역장 등과 같은 시설물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렇게 쌀의 생산·운반·저장에 필요한 시설물의 증설은 매가리공·미선공 등과 같은 노동자들의 필요성과 해당 시설에서의 종사를 필요로 하였다.

정미소에 종사하는 매가리공과 미선공들은 대부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장시간 동안 종사해야하는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임금은 적었으며, 그 적은 임금마저도 일본인 공장주의 판단에 따라 삭감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타개하기 위해 군산 정미 인접 노동 공동 조합과 군산 미선회와 같은 노동 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노동 운동 단체들은 지역 내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이 있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각 정미소 노동자들을 회원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되었다. 단체에 소속된 매가리공과 미선공들은 자신들이 일본인 공장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개선을 요구할 사항이 있을 경우 이들 단체에 가입된 같은 직종의 노동자들과 연대하여 파업을 전개하였다. 일본인 공장주들은 파업이 일어날 경우 미봉책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윤 추구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본인 공장주들의 모습은 군산 지역 각 정미소 직공들의 파업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경과]

군산 지역 최초의 정미 노동자 파업은 1924년 3월 16일 발생한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 연대 파업이다. 낙합 정미소 매가리공 연대 파업은 일본인 공장주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군산 지역 주요 정미소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파업을 일으켰다.

이와 같은 일본인 공장주의 일방적이고 무리한 임금 인하 요구는 이후 군산 각 정미소에서 진행되는 파업에서 원인을 제공하였다. 1926년 11월 8일 조선 정미소(朝鮮精米所) 직공 300여명과 육석 정미소(陸石精米所) 직공의 연대 파업, 1928년 2월 5일 중경 정미소(中井精米所) 미선공 파업, 1929년 10월 21일 남선 정미소(南鮮精米所) 미선공 파업, 1930년 6월 27일 조일 정미소(朝日精米所) 미선공 파업은 모두 임금 일본인 공장주의 일방적 임금 인하에 반대하여 파업을 일으켰다. 1930년 12월 14일에는 군산 지역 모든 정미소의 미선공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대규모의 연대 파업을 계획하였다. 1930년 10월 16일 육석 정미소(陸石精米所) 미선공들은 임금 인하 반대와 함께 동일한 노동에 대한 동일한 대우, 근로 시간 정립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진행하였다. 1933년 11월에 개소된 가등 정미소(加藤精米所)에서는 공장 개소에 지나친 편의를 제공한 사실과 노동단체 소속 직공들을 체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항의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1928년 2월 5일 중경 정미소 미선공들도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파업을 진행하였다. 남선 정미소, 조일 정미소, 육석 정미소 노동자들도 각기 임금 문제로 파업을 벌였다. 이후 군 1930년에는 군산 전 지역의 미선공들의 임금을 7% 인하한다는 방침에 모든 미선공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파업을 기도하였다.

[결과]

각 정미소에서 일어난 파업은 대부분 일본인 공장주들의 일방적인 임금 인하가 원인이 되었다. 정미소 직공들은 정미소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가운데, 연대가 필요한 경우에는 연대하여 대항하였다. 대응 방법은 노동자들이 교섭 단체로 내세운 군산 정미 인접 노동 공동 조합과 군산 미선회 대표들로 하여금 일본인 공장주와 교섭을 실시하였다.

이에 일본인 공장주들은 대책으로 가등·장전·화강·조선 정미소 대표들이 군산 정미공 조합(群山精米工組合)을 조직하여 대응하였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대체 인력 투입, 파업 기획자 및 주동자를 검거하여 파업을 무력화 시키고자 하였다.

일본인 공장주의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각 정미소 직공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일부분 관철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조선 정미소와 육석 정미소 연대 파업의 결과 임금 인하를 철회하고 임금 인상에 합의를 보았다. 이런 결과는 남선 정미소, 조일 정미소 파업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도출되었다. 한편 가등 정미소에 대해서는 정미소 노동자 이외에 군산 지역 객주들도 참여하여 노동 운동 단체 소속 노동자의 고용에 합의를 보았다.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군산 지역 각 정미소의 파업은 군산 정미 인접 노동 공동 조합과 군산 미선회 같은 직업별 노조를 중심으로 미선공들은 높은 단결력을 보여주며 파업을 서로 지원하였다. 이는 미선공들의 파업 투쟁이 초반의 경제 투쟁을 넘어 정치 투쟁으로 항일 투쟁으로의 성격이 변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러 직업별 노조를 중심으로 한 노동 운동은 1920년 이후 지역 민중 운동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한편 파업의 원인이 되었던 저임금, 장시간 노동,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일본인 공장주들의 탄압과 차별이 끊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존 투쟁에 경찰의 무력이 개입하여 억제하려 했던 것은 무력에 의존해서 통치하려 했던 식민 통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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