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95
한자 近代敎育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구희진

[정의]

개항기부터 해방 이전까지 전라북도 군산 지역의 교육.

[개항기의 근대 교육]

군산은 개항 도시로서 신지식과 문물이 교류하는 중심지역으로서 인근 지역보다 근대 교육의 중심지였다. 국권의 위기 속에서, 일제는 문명의 시해를 앞세워 식민지 교육 체제를 정비해가려 하였으나 군산 지역에는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려는 지식인들과 새로운 교육을 받으려는 인재들이 모여들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학교들이 설립되어 갔다.

군산 지역에서의 본격적인 근대 교육은 1899년 군산 개항 직후 대한제국 정부에서 설립한 옥구항 공립 소학교에서 출발한다. 대한제국 정부는 1899년 군산항을 개항하고 옥구부에 사회의 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옥구항 공립 소학교를 설립토록 했다. 옥구부에서는 옥구 향교의 양사재에 공립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옥구항 공립 소학교는 개항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개항장 인근에도 신교육 기관의 필요성이 높아갔다. 이에 따라 1903년 개항장 인근 지역에 옥구항 감리와 교원이 중심이되어서 진명 의숙이라는 학교를 설립하고, 군산항 객주들이 운영 자금을 부담하면서 교육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학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감리의 이임과 더불어 폐쇄되게 되었다.

1900년대 초부터 기독교를 중심으로하는 신교육도 실시되었다. 미국 예수교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 전위렴(Junckin,W.M)과 그의 아내가 남녀 아동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영명 학교와 멜볼딘 여학교로 발전하였다. 전위렴이 세운 학교는 1904년 소학교와 중학교로 분리되었는데 소학교는 안락 소학교로 정하여 구암 교회에서 운영하였으며, 중학교는 영명 학교로 칭하고 선교부에서 운영하였다. 이후 1909년 4년제 중등 과정인 고등과와 2년제 특별과로 인가받으면서 안정적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해갔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옥구, 군산 지역민들의 교육열과 그에 따라 운영되고 있던 학교들을 식민지교육체제 속으로 왜곡 굴절시키려고 했다. 먼저, 대한제국이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려고 설립한 옥구항 공립 소학교를 1906년 폐쇄하였다. 그리고 식민지 교육 체제 수립의 일환으로 만든 보통학교령에 입각하여 공립 군산 보통학교로 바꾸었다가 1907년 개항장 인근 지역으로 옮기고 일본인 교사를 중심으로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려고 했다. 일제는 군산 보통학교를 통해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려 했으나 군산항 인근의 한국인들은 학교를 적극 지원하고 조계지내의 일본인 소학교와 경쟁하면서 제대로 된 소학 교육을 받으려고 했다. 이러한 지원으로 설립 초기에는 6년제로 운영되었으며, 주로 개항장 인근에 새롭게 모여든 상인자제들이 재학하였다.

국권의 위기 속에서 옥구, 군산 지역에서는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많은 학교들이 설립되어 갔다. 옥구 지역에서는 옥구항 공립 소학교가 폐쇄된 이후에 진명 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지속하였다. 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자강 운동이 전개된 곳은 군산항 인근지역이었다. 군산 개항장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이주해 왔는데, 1907년 자강 운동 단체로 옥구 군산항 민단이 창립되었으며 이후 대한협회 군산지회로 개편되고 확대되어갔다. 민단의 주요 활동은 교육 활동이었다. 특히 민단에서는 금호 학교라는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일제 강점에 대항하였다. 군산항 인근에는 민단이외에도 객주들의 상회사나 항구 노동자들의 군산노동회, 어상회사 등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이들 단체에서도 교육 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점이 진행됨과 더불어 교육에서도 식민 교육 체제가 부식되어가고 있었다. 일제는 공립 군산 보통학교에 파견된 일본인 교감을 통해서 학교를 장악해가면서 수업연한을 4년으로 단축하고 식민지 체제에 순종적인 인간을 양성할 수 있는 체제로 바꾸어가려 했다. 그리고 옥구, 군산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세운 다양한 학교들을 폐쇄하고 공립 군산 보통학교를 중심으로하는 식민지적 교육 체제를 재편해갔다. 금호 학교를 폐쇄하여 학교의 재산은 군산 보통학교로 흡수 하였으며, 진명 학교는 군산 보통학교 옥구 분교가 되었다. 그리고 일제는 한국인들의 중등교육요구를 억압하며 군산 보통학교에 실업학교를 병치했다.

[일제 강점기의 근대 교육]

일제 강점기에도 군산, 옥구 지역민들은 치열한 교육열로 어려운 조건에서나마 교육기관을 확장시켜갔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의해서 학교 설립은 억제되었으며, 중등교육의 경우에는 일부의 실업 학교만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억압 속에서서도 군산 사람들은 힘겹게 교육 기관을 확장시켜갔으며,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령아동을 대상으로하는 다양한 종류의 교육기관을 설립해갔다.

군산부 전체에 한국인을 위한 공립소학교가 군산 공립 보통학교 1개교 뿐이 없었으므로 학령아동들은 극심한 입학란을 겪어야 했다. 이에 군산시민들이 거족적으로 협력해서 1927년 군산 제2공립보통학교 설립 기성회를 만들어서 활동한 결과 1929년 개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군산, 옥구의 한국인 교육은 한국인들의 노력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1934년 제2 공립 보통학교가 폐교되어 제1 공립 보통학교에 합병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초등교육은 매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이루어져갔다. 일제 강점기 군산, 옥구 지역의 한국인 공립 소학교는 군산부에 1개교, 옥구군에 16개교로 대략 17개교가 있었다.

군산 사람들은 중등 교육에 대해서도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고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였다. 1903년 설립하였던 영명 학교는 3.1 운동 당시 영명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호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으며, 1940년에는 일제의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자진 폐교하였다. 사립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영명 학교이외에도 1913년 멜볼딘 여학교가 인가되었는데 영명 학교와 같은 예수교 남장로회가 지원하는 학교였다. 1940년 신사 참배를 거부하며 폐교하였다.

일제는 인문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 민족 운동에 앞장서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중등 교육을 억제하고 극 소수의 실업교육기관만을 설립하였으므로 군산의 공립 중등 교육 기관은 실업 학교를 중심으로 설립되어 갔다. 1910년 5월 인가되었던 군산 공립 실업학교는 1911년 군산 공립 농업 학교로 변화되었다가 1923년 정읍으로 이전하여 정읍 공립 농업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1915년 군산 공립 농업 학교에 부설하여 군산 간이 수산 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16년 10월 6일 농업 학교와 분리하여 군산 간이 수산 학교가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이후 1922년 교육령의 개정과 함께 군산 공립 수산 학교로 변경되었으나 1927년 폐교되었다. 그리고 군산에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려는 군산 사람들의 오랜노력으로 1941년 군산 공립 상업 학교가 개교하였다. 군산부 이외에 옥구군에도 실업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17년에는 임피 공립 간이 농업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37년에는 옥구 농업 실수학교가 설립되었다가 이후 옥구 농민 학교, 옥구 농사 학교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운영되었었다.

군산에는 일본인 중등 교육 기관도 설립되었다. 1916년 군산 공립 실과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21년 4년제의 군산 고등 여학교로 승격되었는데 일인 여성 교육 기관이었다. 1923년 군산 중학교가 일본인 전용 중학교로 설립되어 극소수의 한국인 학생만 진학이 가능하였다. 1929년에는 군산 가정 학교가 일본인을 대상으로하는 사립 교육 기관으로설립되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군산에 설립된 이와같은 교육 기관들은 학령 아동을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적은 숫자였으며, 그나마 학비를 감당하기도 힘들어서 대다수의 아동들이 교육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다. 이에 군산 사람들은 공교육에서 배제된 아동과 청소년들을 수용하기 위한 교육 기관과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다양한 모색들을 해나갔다. 이러한 교육 기관은 개인이 설립한 곳도 있었으나 노동조합, 사회단체 등에서 설립하였고 어려운 여건에서나마 군산 시민 사회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찾아가려 했다. 1925년 설립한 일신 야학교는 김용진이 사재로 설립한 학교였고, 1921년 설립된 군산 미선조합 적성 야학교는 미선조합에서 조합원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 야학 교육 기관이었다. 1922년 설립된 영신 여학원은 군산 개복동 기독 청년회에서 설립한 여성 교육 기관이었고 , 1925년 설립된 군산 유아원은 군산 부인 교육회에서 설립한 유아 교육 기관이었다. 이러한 교육 기관들은 식민지하에서 정부의 공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힘들게 운영되었다. 군산 시민 사회의 지원 속에서 힘겹게 유지될 수 있었으므로 학교의 건물은 민족 운동의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군산 사람들은 어려운 조건에서나마 공교육에서 배제된 아동,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을 사회가 책임지고 실시해가려고 노력했는데 이러한 노력은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여 유지되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한송 여학당과 광동 의숙이 운영난에 봉착하자 군산 시민 사회를 대표하는 군산 노동 연맹에서는 1926년 두 학교를 통합하여 군산 학원을 설립하였으며 이후 군산 학원의 맥은 양영 학교로 이어져갔다. 양영 학교는 전시 체제하에서도 군산 시민의 지원으로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군산 시민들은 힘을 합하여 무산 아동 교육의 맥을 이어갔던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