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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59
한자 沃溝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397년연표보기 - 옥구진 설치
폐지 시기/일시 1467년연표보기 - 옥구진 폐진
관할 지역 옥구진 -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지도보기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서북부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군산 지역[옥구현]에 설치한 육군진.

[개설]

개국 직후인 1397년(태조 6), 조선 정부는 효과적인 지역 방어를 위해 기존의 도절제사가 관할하는 군사 단위의 도를 폐지하고, 각 도(道)에 종3품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관할하는 2개~4개의 진(鎭)을 설치하였다. 전라도에는 옥구[현 군산], 목포, 조양, 흥덕에 진을 설치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은 건국 직후 고려 말의 제도[도순문사(都巡問使)를 1389년(공양왕 1) 도절제사(都節制使)로 개칭함]를 이어 받아 각 도(道)[군익도 체제하에 지방군을 운영했던 북방지역을 제외한, 경기좌도, 경기우도, 전라도, 양광도, 교주도, 강릉도, 서해도 등]에 전임(傳任) 도절제사(都節制使)를 파견하여 도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특히 하삼도[양광도, 전라도, 경상도]는 왜구의 침범이 잦았던 군사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고려 말부터 도절제사가 파견되었고 영(營)이 설치되었다. 하삼도에 설치한 영의 소재지는 경상도 합포(合浦), 전라도 광주(光州), 양광도 이산(伊山)이었다.

도절제사를 파견하여 도 단위별로 지방군을 운영하였던 것은 조선 왕조의 지방 통제력 강화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도절제사가 관할하는 담당 군사 지역은 지방 통치 체체인 도 안에 속한 구역이었다. 따라서 도절제사의 파견은 조선 왕조 지방 군사 제도의 시발점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각 도별로 파악된 군사 단위 편성은 1393년(태조 2) 5월에 실시한 군적 조사 사업으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더불어 도절제사는 휘하에, 병마사(兵馬使) 1인, 지병마사(知兵馬使) 1인, 병마부사(兵馬副使) 1인, 판관(判官) 3인, 사환(使喚)인 반당(伴黨)3인이 배속되어 보좌를 받았다. 그리고 1397년(태조 6) 2월에는 도절제사의 권한과 감독을 규정하는 절목(節目)을 반포하여 법제화시켰다. 그리하여 도절제사가 지방군을 통솔할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도절제사는 휘하에 9인의 기간 요원만 있을 뿐, 직할 병력이 없었다. 당시 도절제사는 해당 군현에 왜구의 침입이 발생하면 인근 주변의 장정을 모집하여 해당 지역으로 출동하였기 때문에 현지에 도착하면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위급 사항이 발생하면 효과적으로 대응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취약점 때문에, 도절제사가 관장하는 군사 단위로서의 도를 폐지하고 1397년(태조 6) 5월, 각 도의 국방상 요해처[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연해안 일대]에 2~4개의 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각 진에 첨절제사를 파견하여, 도관찰사의 감독하에 인근 군현의 군사를 통괄하게 하였다.

[관련 기록]

『태조 실록』, 『태종 실록』, 『세종 실록』, 『문종 실록』, 『세조 실록』에는 옥구진 설치 및 전라 수영과의 관계, 병력 및 화거 배치 등의 기사가 실려 있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옥구현 조에는 1423년(세종 5)에 옥구현의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고치고, 또 후에 현감으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내용]

옥구는 1995년 통합 이전 군산시 일대와 옥구읍·옥서면·옥산면·회현면 일대 지역이다. 백제 시대에는 마서량현(馬西良縣)이었고, 통일 신라 시대 전주(全州) 임피군(臨陂郡)[현재의 군산시 임피면 일대 지역] 관할 아래 있던 3개 현(縣)[함열현, 옥구현, 회미현] 중의 하나였다.

옥구는 연해(沿海)의 요해지(要害地)였다. 삼국 통일기에 당나라는 우리나라 여러 지역에 도독부를 설치하려 하였는데, 그 때에 마서량(麻斯良)에 귀화현(歸化縣)을 세우려 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마서량(麻斯良)은 옥구의 옛 지명인 마서량(馬西良)의 이칭(異稱)으로 파악된다.

통일 신라기의 지방 통치 체제는 고려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고려 때에는 임피군임피현으로 등급이 떨어지고, 임피현의 속현이 회미현, 부윤현, 옥구현, 만경현 등 4개의 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통일 신라 시대~고려 시대까지 옥구현은 계속해서 임피현의 속현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옥구 지역으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옥구의 위상이 달라진다. 왜구는 13세기 초부터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약탈행위를 일삼았는데, 14세기 중반에 들어서 왜구의 침입은 더욱 빈번해지고 규모도 매우 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1380년(우왕 6) 8월 왜구들은 500척에 이르는 대선단을 거느리고 옥구 북쪽에 자리한 진포로 침입해 왔는데, 왜구의 수는 10,000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왜구의 대함대를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 부원수 최무선이 이끄는 고려 함대가 화약 병기를 사용해 궤멸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포 대첩이다. 진포 대첩 이후, 왜구의 침략 루트인 옥구 지역은 국방상 중요 지역으로 부각된다.

개국 직후인 1397년(태조 6)에 조선 정부는 효과적인 지역 방어를 위해 기존의 도절제사가 관할하는 군사 단위의 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종 3품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2~4개[총 15곳]의 진(鎭)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전라도에는 옥구를 비롯하여 목포, 조양, 흥덕에 진이 설치되었다. 고려 시대까지 임피현 속현으로서 지방관조차 파견되지 않던 옥구 지역이 주변의 군사까지 통괄하는 종 3품 첨절제사[전문 무관 출신으로 임명]가 상주하는 진으로 격상된 것이다. 아울러 각 진에 파견된 첨절제사[태종 이후부터는 병마사로 명칭이 바뀜]는 해당 지역 부·군·현의 수령직[목민관]도 겸하였다.

진은 도보다 작은 소단위 군사 구역의 중심 거점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도 단위의 병력 운용 방식과는 달리 진에는 소속 병력이 상주하였다. 소속된 병력들은 대부분이 마병[기병]이었다. 옥구진에는 세종 대에 정병 300명이 있었으며, 1462년(세조 8)에는 군액이 좀 더 늘어 400명이 있었다. 또 문종 때에는 화거(火車) 10여대가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1398년(태조 7년)에 전임 도절제사가 관할하는 도 단위의 군사 제도가 다시 부활한다. 하지만 복치된 도절제사는 이전과는 크게 달랐다. 휘하에 직할 병력을 거느리고 영이 따로 마련되었다. 고려말에 설치되었던 전임 도절제사 제도가 이때 와서 확립된 것이다. 하지만 진의 위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첨절제사에 대한 통할권이 도관찰사에서 전임 도절제사로 넘어간 것뿐이었다. 이 후 진관 체체(鎭管體制)가 완성되어 옥구진이 폐진되는 1467년(세조 13년)까지, 별다른 큰 변화 없이 전라도 서북부 지역의 국방을 담당하였다.

[변천]

조선 개국 직후인 1397년(태조 6)에 조선 정부는 각도에 종 3품 첨절제사가 관할하는 2~4개의 진을 설치하였다. 이때에 전라도에는 옥구, 목포, 조양, 흥덕에 진이 설치되었다.

1455년(세조 1)에는 평안도, 함경도 등 북방의 군사 체제인 군익도 체제(軍翼道體制)[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중·좌·우 3익으로 편성하는 군사 조직 체제]를 전국에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종전의 진은 주로 연해안 지역에 설치되어 내륙의 방어에는 소홀한 면이 있었다. 이에 내륙 지방에 거진(巨鎭)을 세우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는데, 이때 옥구진(沃溝鎭)은 3익(翼) 중에 거진[옥구진: 중익-옥구-, 좌익-함열·용안-, 우익-임피-]으로 중익(中翼)에 편성되었다.

군익도라는 획기적인 군사 조직 체계 개혁이 있은지 2년 뒤인 1457(세조 3) 10월 군익도 체제는 진관 체제로 개편되었다. 진관 체제는 전국 각지의 요충지를 거진으로 해서, 거진의 군사 기지로서 거점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나머지 주변 지역의 진들이 거진에 소속되도록 한 것이다. 옥구진은 기존의 군익도 체제에서 거진의 자리를 전주에 내주고, 진관 체제가 완성되는 1467년(세조 13)에 혁파되고, 전주진관(全州鎭管)에 속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옥구진을 통해 군산이 근대 이전부터 군사적·경제적 중심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