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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43
한자 臨陂縣
이칭/별칭 취성,피산,흔문,시산,소도,실조출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757년 - 시산군에서 임피군으로 개정
개정 시기/일시 1018년 - 임피군에서 임피현으로 강등
개정 시기/일시 1895년 - 임피현에서 임피군으로 개정
관할 지역 임피현 -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정의]

통일 신라부터 조선 시대까지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 일대에 설치된 행정 구역.

[개설]

임피는 옛 마한 시대부터 군산 동부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임피 지역은 백제 때 시산군(屎山郡)으로 불리다가, 경덕왕임피군으로 명칭을 고치고 함열현, 옥구현, 회미현 등 3개 현을 관장하였다. 고려 1018년(현종 9)에 임피현으로 강등되었지만 전주목(全州牧)에 속하여 여전히 4개현 혹은 2개현을 거느린 주현(主縣)의 위상을 유지하였다. 임피현은 1895년 임피군으로 바뀌었다가 1914년에 임피면으로 고쳐진 뒤 옥구군에 병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신라 경덕왕은 전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757년(경덕왕 16)에 기존의 중앙 관부명과 관직명, 주·군·현의 고유 명칭을 모두 폐기하고 한자식으로 바꾸는데, 이때 백제식 행정 구역 명칭인 시산군(屎山郡)도 임피군으로 바뀌었다.

임피군은 고려 시대에는 임피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를 개편할 때 다시 임피군으로 행정 명칭이 바뀌었다.

[관련 기록]

‘임피’의 유래와 연혁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고려사』, 『세종 실록 지리지』, 『신증 동국 여지 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임피현 읍지』, 『대동 지지(大東地志)』 등에 잘 설명되어 있다. 특히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현의 별칭, 조선시대 당시의 호수(戶數)인구, 군정(軍丁), 토성(土姓) 토지 결수 토산물 월경지(越境地)와 관련한 기록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내용]

임피현옥구현 보다 규모가 컸던 읍으로, 『세종 실록 지리지』에 등재된 임피현의 영역은 동쪽으로 함열현 경계까지 9리, 서쪽으로 옥구현 경계까지 16리, 남쪽으로 전주부 경계까지 17리 북쪽으로 충청도 한산군 경계까지 15리이다.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는 동쪽으로 전주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15리, 남쪽으로 만경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서쪽으로 옥구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20리 북쪽으로 함열현 경계에 이르기까지 11리, 충청도 한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7리 서울과의 거리는 489리로 쓰여 있다.

영역의 변화는 조선 후기에도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후반에 작성된 『호남 읍지(湖南邑誌)』「임피현」에는 동쪽으로 함열현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만경현 경계까지 20리, 서쪽으로 옥구현 경계까지 20리 북쪽으로 충청도 한산군 경계까지 20리로 기재되어 있다.

군현 아래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18세기 후반에 간행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자료를 통해 볼 때 임피현에는 현내면(縣內面)·동일면(東一面)·동이면(東二面)·남일면(南一面)·남이면(南二面)·남삼면(南三面)·남사면(南四面)·서삼면(西三面)·서사면(西四面)·북일면(北一面)·상북면(上北面)·하북면(下北面)·북삼면(北三面) 등 총 13개면 108리가 있었다.

19세가 후반에 간행된 『호남읍지』「임피현」에도 각 면·리 별로 같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다. 다만 19세기 후반에 작성한 『전라북도 각군 읍지((全羅北道各郡邑誌)』「임피」에서는 상북면이 상북이면(上北二面)으로, 하북면이 하북이면(下北二面)으로 쓰여 있다.

19세기에 작성한 읍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9세기까지 행정 구역의 변화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임피는 백제 시대에는 시산군(屎山郡)이라 불렀던 곳이다. 757년(경덕왕 16)에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임피군으로 이름을 고쳤고, 전주 예하 함열현, 옥구현, 회미현을 속현으로 관장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의 지방 제도는 940년(태조 23) 주·부·군·현(州府郡縣)으로 편제한 이래, 982년(성종 2)에 지방 통제를 위해 전국의 주요 12개 주(州)에 12목(牧)을 설치해 외관을 파견하면서부터 구체적으로 정비되었다. 이후 995년(성종 14) 전국을 10개 도로 나누어 각 주를 소속시켰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군산 지역은 강남도(江南道) 전주목(全州牧)에 소속되었다. 이러한 고려 지방 제도는 현종, 예종 대를 거치면서 12목은 8목으로, 10도는 5도 양계(五道兩界)로 재편되었다. 5도는 양광도·경상도·전라도·서해도·교주도를, 양계는 현재 평안도 일대인 북계(北界)와 강원도·함경도 일부지역에 걸쳐있는 동계(東界)로 나뉘었는데, 이때 군산이 속한 전주목은 전라도에 편제되었다. 5도 양계 체제하에서 전주목에는 1개 군과 11개 현이 분속되었고, 그 관할 하에 1개 지사부, 1개 지사군, 4개 현령관이 있었는데, 군산 지역은 현령관이 배치된 임피현(臨陂縣)에 속해 있었다. 임피현은 본래 시산군(屎山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대에 임피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시대에 이르러 임피현으로 강등되었다. 임피현은 현령이 파견되지 않은 회미현(澮尾縣)[현재의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지역], 옥구현(沃溝縣), 부윤현(富潤縣), 만경현(萬頃縣) 등 4개 현을 관장하였다. 그러다가 만경현과 부윤현은 예종 대 이후 임피현에서 분리되었다.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 따르면, 만경현은 “예종 원년 감무(監務)가 설치된 후에 현령으로 승격되었고, 본조(本朝)[『신증 동국 여지 승람』이 쓰여진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감무는 주로 외관이 없던 속현(屬縣)에 파견되어 속현을 주현화(主縣化)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만경현에 감무가 파견된 예종 대는 이러한 목적으로 감무가 파견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만경현은 고려 예종 대에 감무 파견을 통해 임피현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한 결과 현령이 파견되는 주현(主縣)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부윤현이 만경에 이속(移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속 시점은 만경현에 현령이 파견된 이후로 추정된다. 또한 10도 체제 당시 옥구 북쪽 10리쯤에 문창현(文昌縣)이 설치되었으나 1143년(인종 21) 폐현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 시대 군산 지역은 점차 주현인 임피현을 중심으로 속현인 옥구현, 회미현이 하나의 권역으로 묶이게 되었고, 기존에 임피현에 속했던 만경현은 임피현에서 분리되고 임피의 또 다른 속현인 부윤현을 속현화하는 등 행정구역상의 변화가 있었다.

임피는 조선 시대에도 임피현으로 불렸다가 1895년(고종 32)에 전주부(全州府) 산하의 임피군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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