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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현읍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379
한자 臨陂縣邑誌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단행본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병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읍지

[정의]

편찬 연대 미상의 전라도 임피현[지금의 군산시 임피면]에 관한 고을지.

[개설]

임피현전라북도 군산시 임피면·서수면·대야면·개정면·성산면·나포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의 이름이다. 삼국 시대에 백제의 시산군(屎山郡) 또는 피산(陂山)·소도(所島)·흔문(忻文)·실오(失烏)라 불리던 지역으로서, 신라의 백제 정복 후엔 행정 구역 개편으로 757년(경덕왕 16)에 임피군으로 개칭되었고, 옥구현(沃溝縣)·회미현(澮尾縣)·함열현(咸悅縣)을 영현으로 관할하게 된다. 고려 시대인 1018년(현종 9)에 임피현으로 강등되었으나, 회미현·함열현·옥구현·만경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고 있었던 큰 고을이었다. 북쪽으로 금강, 남쪽으로 만경강 하류를 경계로 했던 임피현에는 고려 시대에 12개 조창(漕倉)의 하나인 진성창(鎭城倉)이 있었던 전라도 조운(漕運)의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도 임피현이었으며, 별호는 취성(鷲城)·임영(臨瀛)이었다. 지방 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전주부 임피군, 1896년에 전라북도 임피군이 되었다. 그러나 1914년 일제의 군면 대통폐합 때 임피군이 폐지되고, 남일면·내면이 임피면으로, 동이면·동일면이 서수면으로, 남사면·남삼면·남이면이 대야면으로, 서사면·서삼면이 개정면으로, 북일면·상북면이 성산면으로, 하북면·북삼면이 나포면으로 폐합되어 옥구군에 병합되었다.

이 책의 내용 중 「호구(戶口)」조에 4‚472호(戶)‚ 22‚138구(口)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는 1794년(정조 18)에 작성된 『군국총목(軍國摠目)』[奎12195] 제6책 호남(湖南)조의 숫자와 일치되어, 아마도 1794년 무렵에 작성된 읍지를 저본으로 하여 일제 시대에 전사(轉寫)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구성/내용]

『임피현읍지』의 내용은 건치연혁(建置沿革)·군명(郡名)·관직(官職)·방리(坊里)·도로(道路)·성지(城池)·산천(山川)·성씨(姓氏)·풍속(風俗)·학교(學校)·서원(書院)·단묘(壇廟)·공해(公廨)·제언(堤堰)·장시(場市)·교량(橋梁)·역원(驛院)·사찰(寺刹)·누정(樓亭)·형승(形勝)·물산(物産)·진공(進貢)·상납(上納)·호구(戶口)·전총(田摠)·전세(田稅)·대동(大同)·균세(均稅)·봉름(俸廩)·요역(徭役)·창고(倉庫)·조적(糶糴)·군기(軍器)·군액(軍額)·노비(奴婢)·인물(人物)·과환(科宦)·고적(古蹟)·책판(冊板) 등으로 되어 있는데, 특히 서원조에는 김집(金集)을 주향(主享)하고 김구(金絿)를 배향하는 봉암 서원(鳳巖書院)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경제·군사 관계 측면인 「상납(上納)」·「조적(糶糴)」·「군기(軍器)」·「군액(軍額)」 등이 비교적 자세하여 여타의 정조(正祖) 때 읍지 편찬 경향과 일치된다.

이 밖에 임피현 읍지로는 1895년(고종 32)에 작성된 『호남 읍지(湖南邑誌)』[奎12181] 제11책에 실린 『임피현읍지(臨陂縣邑誌)』가 전한다.

[의의와 평가]

현재의 군산시 일부를 이루는 임피면에 관한 자료로서, 전근대 시기 임피면에 관한 내용을 소상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참고문헌]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http://kyujanggak.snu.ac.kr)
  • 한국학 중앙 연구원(http://www.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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