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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동 마을과 제주고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07
한자 翰林洞-濟州高氏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김두헌

[정의]

한림동(翰林洞)은 무려 약 850년이란 오랜 세월의 전통과 역사를 지닌 마을이다. 이 마을의 역사는 군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이면서 대성(大姓)이었던 제주고씨의 운명과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한림동은 고려 중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어느 한 성씨의 거주지 이동, 재산 상속, 혼인 풍속 등의 변화 양상을 일괄하여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마을이므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은 마을로 발전 계승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제주고씨의 한림동 입거(入居)]

한림동 마을의 역사는 제주고씨가 옥구로 입거하면서 시작되었다. 곧, 제주고씨 고돈겸(高惇謙)이 12세기 중엽에 오식도(筽篒島)로 유배되었지만 유배가 풀리지 않아 한림동에 이주하였는데, 이때부터 한림동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고려 시대 9명의 학사(學士)를 배출한 한림동(翰林洞)]

마을 이름을 한림동이라고 부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서 고려 시대에 아홉 명의 상서(尙書)와 열 두 명의 한림원 학사(學士)가 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들은 성씨가 제주고씨였으며, 앞서 언급한 고돈겸의 후손들이었다. 상서(尙書)는 고려 시대에 국가의 주요 실무를 담당한 6부의 장관들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해당 관서를 육조라고 하였고, 그 장관을 판서(判書)라고 하였다. 고려 시대 한림원은 국가의 문원(文苑)을 도맡은 관청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학사(學士)라고 하였다. 따라서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들은 고려 시대에 학문과 인격 두 방면에서 최고의 정점에 있었던 관리들이었다. 그러한 한림원 학사를 아홉 세대 동안 연이어서 12명이나 배출한 마을이 바로 한림동이었다.

한림동에서 배출한 9명의 학사(學士)들 중에는 당시 고려 정부로부터 시호(諡號)까지 받은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은 고돈겸의 고손(高孫) 고경(高慶)고경의 아들 고용현(高用賢)이었는데, 각각 문충공(文忠公)문영공(文英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들 중 고경은 국가에 공을 세우자 고려 정부에서 제주도의 ‘제양백(濟陽伯)’으로 봉군(封君)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원(元) 간섭기라서 원의 요청에 의해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한 연유로 옥구(沃溝)의 옥성군(玉城君)으로 봉(封)하였다고 한다. 옥구와 임피(臨陂)에 세거한 제주고씨(濟州高氏)들은 자신들이 문충공 고경의 후손들이라는 뜻으로, 자신들을 제주고씨 문충공파(文忠公派)라고 불러왔다.

[고려 시대 한림동 출신 의인(義人) 제주고씨 부인]

고려 시대에 한림동에서 배출한 여성들 중에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수(金須)의 부인(婦人)이었다. 제주고씨(濟州高氏) 부인(婦人)은 제주고씨(濟州高氏) 옥구 입향조 고돈겸의 증손녀였고, 재상(宰相)을 지낸 고형중(高瑩中)의 손녀였으며, 예빈경(禮賓卿)을 지낸 고정(高挺)의 딸이었다. 102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무엇보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다.

제주고씨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수(金須)에게 시집을 갔다. 김수가 농장을 감찰하러 지방으로 출장 갔을 때, 어느 날 어느 한 농장 주인이 관리인을 시켜 뇌물로 한 수레의 숯을 김수의 부인 제주고씨에게 갔다 주도록 하였다. 관리인은 제주고씨 부인에게 남편 김수가 보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제주고씨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출장 중에 사람을 시켜 이러한 숯을 보낼 리가 없다는 이유로 뇌물을 실은 수레를 대문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사람을 시켜 문 밖에 있는 수레를 지키도록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당시 이러한 모습을 문밖에서 숨어서 끝까지 지켜 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제주고씨 부인의 남편 김수를 시기하는 사람이 보낸 첩자였다. 당시 제주고씨 부인에게 뇌물을 주려고 시도한 농장 주인이 뇌물을 준다는 사실을 미리 김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 알리자, 그 시기하는 자가 첩자를 보내 제주고씨 부인이 뇌물을 받는 현장을 포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현장을 포착하게 되면, 곧바로 그 사실을 근거로 김수를 탄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김수를 시기한 자는 제주고씨 부인이 뇌물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시켜 지키도록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이 보낸 첩자로부터 듣고, 오히려 감복하였다고 한다. 제주고씨 부인의 청렴한 성품이 남편을 위기에서 구출해 낸 것이다.

이후 제주고씨 부인의 남편 김수는 원에 대항하여 일어난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도로 갔다. 진압하는 시일이 오래 걸리자, 제주고씨 부인은 남편의 옷가지 등을 쌓아서 사람을 시켜 제주도로 보내려고 하였다. 이때 남편 부하의 부인들도 자신들의 남편들의 옷가지 등을 쌓아서 같이 보내려고 제주고씨 부인에게 가지고 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남편들을 잘 보아달라고 제주고씨 부인에게 뇌물로 은자(銀子)를 주었다. 하지만 그 은자 역시 제주고씨 부인은 받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제주고씨 부인의 청렴한 성품과 행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그녀의 인품을 칭송하는 소리가 세간에 자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제주고씨의 남편 김수는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제주고씨 부인은 남편이 사망한 이후 60여 년 동안 무려 102세까지 장수하면서 부인으로서 지켜야 할 정절을 굳게 지키었다. 뿐만 아니라 혼자 살면서도 남편이 살아 있을 때와 똑 같이 친족들과 줄곧 돈목(敦睦)하게 지냈다. 또한 자녀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성실함과 자애로움을 잃지 않았으며, 집안 노비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제주고씨 부인의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결과, 그녀의 두 명의 아들들이 모두 고위 관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고려 시대 한림동 제주고씨들의 혼인 양상과 군산 지역의 위상]

고려 시대에 한림동에 거주한 제주고씨들은 당대 명문가 출신들과 혼인하였다. 당시 제주고씨들이 혼인 관계를 형성한 대표적인 가문으로 광산 김씨, 철원 최씨, 려산 송씨, 남원 양씨, 평강 채씨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문들은 중앙의 고위 관직자들을 다수 배출한 이른바 벌열 가문들이었다. 이러한 제주고씨의 혼인 관계 양상을 통해서 고려 시대에 군산 지역이 중앙의 정치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 시대에 군산진이 있었던 선유도에 숭산 행궁이라는 임금의 제2 행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송(宋)나라 사신 서긍이 저술한 『선화봉사 고려도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 이전 그 언젠가부터 왕릉과 같이 규모가 큰 무덤이 선유도에 있었다는 사실이 고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바로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서 고려 시대에 군산 지역이 정치적, 외교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지역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고려 시대 한림동 제주고씨들의 거주지 이동]

한림동에 거주한 제주고씨들은 고려 시대에 옥구가 아닌 타관(他官)으로 거주지 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여기서 타관은 중앙에서 군수나 현감 등의 지방관을 파견한 말단 행정 구역을 말한다. 제주고씨들이 거주지를 이동한 타관은 대부분 옥구와 인접한 지역이 아닌 멀리 떨어진 지역들이었다. 그것은 당시 제주고씨들이 한림원 학사 등 중앙의 고위 관직에 많이 진출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주고씨들은 타관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가리지 않았다. 곧, 아버지의 거주지에서 항상 큰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거주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 아들이나 셋째 혹은 넷째 등이 아버지가 거주한 옥구에서 계속 거주한 경우가, 큰 아들이 거주지를 세전한 경우보다 오히려 더 많았다. 그리고 옥구에 계속 거주한 자는 여러 형제 중 오직 한 명이었다. 이렇듯 고려 시대에 제주고씨들이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가리지 않고 타관으로 활발하게 거주지를 이동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고려 시대에 재산 상속이나 제사 봉행이 큰 아들 위주로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행해졌기 때문이었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고르게 분배하는 평균 분배 관행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제(輪祭)의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재산을 받은 처가(妻家)나 외가(外家)가 있는 지역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조선 시대 한림동 제주고씨들의 거주지 이동]

고려 시대에 옥구에 세거한 제주고씨들은 조선 초기가 되면서 한림동에서 옥구현 관내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옥구현이 아닌 타관으로 거주지를 이동하는 양상도 고려 시대에 이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고려 시대의 재산 분배와 제사 봉행 관행이 조선 전기까지 줄곧 유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비해 조선 전기에 이르러 옥구에 거주한 제주고씨들의 타관으로의 거주지 이동 양상에 변화가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 이동 거리가 짧아졌다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 이들이 타관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지역은 대부분 고려 시대와 같이 옥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 아니라 옥구와 인접하거나 가까운 지역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임피로 이동한 고인충, 부안으로 이동한 고희의 직계 선조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 전기에 이들이 진출한 관직들이 고려시대에 비하면 대부분 하위의 관직들이었고, 관직 진출자도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인 조선 후기에 옥구에 거주한 제주고씨들이 타관으로 거주지를 이동한 양상은 이전 시기에 비하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제주고씨 중에 관직에 진출한 자들이 그 이전의 시기에 비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 상속이나 제사 관행 역시 장자 위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제주고씨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각 가문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지, 전국적으로 있었던 보편적인 양상이었다.

[조선 시대 군산 지역 제주고씨들의 위상]

조선 시대에 옥구에 거주한 제주고씨들과 혼인 관계를 형성한 연유로 여러 성씨들이 옥구와 임피에 입거하였다. 그 대표적인 성씨로 경주 이씨, 탐진 최씨, 평산 조씨 등을 들 수 있다. 경주 이씨이몽원(李夢黿)이 16세기에 파주에서 옥구로 입거하면서부터, 그와 그의 후손들이 경주 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옥구파(沃溝派)를 이루며 옥구에 세거하였다. 이몽원의 어머니가 옥구에 거주한 광주 반씨(光州潘氏)였고, 처(妻)가 옥구에 거주한 제주고씨 고흥효(高興孝)의 딸이었다. 탐진 최씨(耽津崔氏)최자호(崔自浩)가 16세기에 옥구에 입거하면서부터 그와 그의 후손들이 탐진 최씨 임피 술산파(臨陂戌山派)를 형성하면서 임피에 세거하여 왔다. 최자호의 처(妻) 역시 옥구에 세거한 제주고씨 고흥효의 또 다른 딸이었다. 곧, 경주 이씨 이몽원탐진 최씨 최자호는 모두 제주고씨 고흥효의 서로 다른 딸들과 혼인한 동서 사이였다. 이들은 처가(妻家)가 있는 옥구와 옥구에 인접한 임피로 각각 거주지를 이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평산 조씨(平山趙氏) 조침(趙琛)이 16세기에 김제에서 임피로 입거하면서부터, 평산 조씨 충정공파(忠貞公派)가 임피에 세거하였다. 조침의 처가(妻家)는 옥구에 세거한 광주 반씨였고, 진외가가 옥구에 세거(世居)한 제주고씨 문충공파(文忠公派)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시대에 제주고씨와 혼인한 연유로 옥구와 임피에 세거한 여러 성씨들이 있었다. 그만큼 제주고씨는 당시 옥구와 임피의 중심 성씨로서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및 일제 강점기 유교 문화 중심지였던 한림동]

옥구에 세거한 제주고씨들과 군산 지역의 유림들은 1685년(숙종 11)[또는 1565년(명종 20)이라는 설도 있다.]에 제주고씨가 처음으로 들어와 거주한 한림동염의 서원(廉義書院)을 창건하였다. 이들은 염의 서원에 우리나라 유학의 비조(鼻祖)이면서 옥구 지역에 일정 기간 거주하면서 학문을 탐구한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과, 고려 시대 한림동 출신으로 한림원 학사를 지냈고 국가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았던 문충공(文忠公) 고경(髙慶)문영공(文英公) 고용현(髙用賢)의 위패를 각각 모시고, 해마다 이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왔다. 이후 염의 서원은 1804년(순조 4)에 정부로부터 사액(賜額)을 받았다. 그러나 1898년(고종 5)에 흥선 대원군이 전국적으로 실시한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염의 서원도 헐리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20년에 이 지역의 유림들은 염의 서원을 다시 한림동에 건립하였다. 그 목적은 전통 문화가 짓밟히는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유교 문화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염의 서원(廉義書院) 바로 옆에 제주고씨의 입향비[고려 병부 상서 문하시중 고돈겸 선생의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옥구에 세거한 제주고씨들의 무덤은 월명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은 고려 시대에 옥성군(玉城君)으로 봉군된 제주고씨 고경이 사패지(賜牌地)로 받은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금도 제주고씨 선조들의 무덤이 제륜산 기슭[현재 은적사 뒷산, 군산 수원지 부근]에 자리하고 있는데, 군산에 세거한 제주고씨 후손들은 이 묘소들 제일 위에 문영공(文英公) 고용현(高用賢)의 매안소(埋安所)를 설치하여 따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림동의 역사적 의의와 향후 연구 방향]

한림동 마을의 역사는 군산에 세거한 제주고씨와 그 운명을 같이 하였다. 제주고씨 고돈겸이 12세기 중엽에 옥구 오식도(筽篒島)로 좌천되어 유배가 풀리지 않자 한림동으로 들어와 거주한데서부터 한림동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고려 시대에 한림동은 아홉 명의 상서(尙書)와 열 두 명의 한림원 학사를 배출할 정도로 유명한 마을이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한림동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 들어서면서 한림동에 거주한 제주고씨들 중 일부는 한림동에서 옥구현 관내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일부는 옥구가 아닌 타관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옥구에 거주한 제주고씨와 유림들이 한림동에 우리나라 유학의 비조(鼻祖)인 최치원한림동 출신이면서 고려 시대 학자 관료이면서 시호까지 받았던 문충공 고경문영공 고용현의 위패를 모신 염의 서원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제주고씨와 군산 지역 유림들이 유교 문화를 계승시키려는 목적으로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한림동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 세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군산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번창한 성씨였던 제주고씨의 입향과 거주지 이동, 재산 분배와 제사 관행의 변화 양상 등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연구 대상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군산의 유교 문화의 근원지이면서 중심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한림동제주고씨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전통기 시대 군산의 위상과 각 성씨들의 존재 양상을 탐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곧, 한림동은 전통기 시대 옥구에 세거한 제주고씨의 존재 양상, 유교 문화의 변화 과정, 그리고 군산 지역의 위상과 여러 성씨들의 존재 양상 등을 밝히는데 꼭 필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한림동제주고씨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것들에 대해 개괄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제는 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고려시대 한림동에 거주한 제주고씨들의 과거 합격과 관직 진출 양상 및 타관으로의 거주지 이동 양상이 보다 세밀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한림동에 세거한 제주고씨들이 조선 초기에 옥구현 관내 지역으로 이주한 이유, 조선 중기에 옥구현 관내 지역에서 동성촌을 형성하는 과정, 조선 전 기간 동안의 과거 합격과 관직 진출 양상, 충신과 효자 및 열녀를 배출한 양상과 이들에 대한 포창, 혼인 관계망의 변화 양상 등에 대한 연구도 필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한림동제주고씨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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