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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강 금강의 포구와 나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03
한자 生命-江錦江-浦口-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집필자 정원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0년 8월 - 금강 내 여객선 첫 운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4년 - 여객선 행운호 서천의 지포 선착장에서 침몰

[정의]

전라북도 군산 지역과 충청남도·충청북도 일대를 아우르는 금강의 포구와 나루.

[개설]

전라북도 군산시를 경유하여 서해와 합류하는 금강은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충청북도를 아우르는 우리나라 4대강 가운데 하나이다. 이름 없는 산골에서 시작하여 작은 냇물이 모이고 모여 도도히 흐르는 강(江)은 우리 조상들에게는 생존의 터전이며,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고, 모이고 흩어지는 흥망의 기점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혹자는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강을 칭하여 한강은 그 기운찬 흐름이 왕국의 강이며, 섬진강은 굽이굽이 어머니의 강이고 금강(錦江)은 온전히 역사의 강이라 했다. 비단처럼 아름답다 하여 비단 금(錦)자를 사용하였다는 금강은 총 길이 401㎞, 유역 면적 9,882㎢로 충청남도, 충청북도, 전라북도의 3도를 물길로 달려 수많은 산과 들을 만나 휘감기었다.

선사 시대부터 먹을거리가 풍부한 강을 찾았던 인간들은 그 강가에 마을을 건설하여 강의 흐름에 역사라는 배를 띄워 항해해 왔다.

[역사의 강]

전라북도 군산 출신 대표적 소설가인 채만식은 그의 소설 『탁류』에서 금강과 군산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 [한강(漢江)이나 영산강(榮山江)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黃海)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탁류에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大處)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채만식의 소설 「탁류」 중에서]

일찍이 백제의 도읍인 공주와 부여의 대외 교통로 역할을 해왔던 금강은 고려 시대에는 각 지방의 세곡을 모아 운반하는 조창 제도가 활성화됨으로써 국가 경제적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이후 시간을 달리하며 호남과 충청 지역의 세곡을 운반하는 물류 창고[조창] 십 여 곳이 금강 기슭에 자리하였음은 금강의 해상 운송로로서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당시 금강에는 수많은 포구가 번창하였고 포구마다 객주가 시장을 운영하여 황포돛배들이 꼬리를 물며 왕래했는데 대한 제국시기에는 중국의 밀무역선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해상의 고속 도로였다고 할 수 있었다.

금강 최고의 포구인 강경 포구는 1904년 한 해 강경을 출입한 선박이 1만 여 척에 이르러 당시 수운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1911년 호남 철도의 대전~강경선 개통과 1912년 강경~이리~군산선이 개통되며 금강의 수운은 철도와 경합 관계로 변모한 후 약화되다가 1990년 금강 하구둑이 만들어지며 물길이 막혀 수운의 기능을 중단하게 된다.

[금강의 여객선]

미래의 금강을 보기에 앞서 과거 금강이 지닌 해상 운송의 기억을 더듬어 살펴보면 금강은 일제 강점기에는 금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락선의 운항으로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금강의 여객선이 언제부터 운항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충청남도 부여군 양화면 입포 마을의 노인들은 여객선 운항의 시작을 입포 최초의 객주라는 노중락이 자신의 황포돛배로 이틀에 한 번씩 군산에서 생활 필수품을 실어 나르던 것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운행한 황포돛배가 변하여 군산~강경 사이를 조수에 맞춰 1일 2회 왕복하는 여객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후 정기적으로 정해진 운임을 받으며 운항한 여객선의 시작은 1899년 군산이 개항된 후 동력선이 들어온 뒤부터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한 첫 번째 여객선의 운항은 1900년 8월 인천에 거주하는 일본인 기무라[木村]가 한국인의 명의를 빌려 8톤급 소형 증기선 강경환(江景丸)과 24~25톤급의 황산환(黃山丸)을 운행하며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금강에서 배의 운항이 가능한 범위는 하구 전라북도 군산에서 상류의 종점인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부강리까지였는데 일반적으로 발원지에서 충청북도 청원군의 부강까지를 강의 상류로 보고, 중류는 부강~강경 간[85.7㎞]인데 이 지역은 직선상의 물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미호천이 합강리에서 유입되고 갑천, 정안천, 유구천, 은산천, 금천 등의 여러 지류가 합류한다. 하류는 강경~하구[41㎞]의 구간인데 이른바 진강이라고 한다. 이 구간은 하폭이 강경 392m, 하구부 175m 정도로 큰 배의 유입이 가능한 곳이었다.

금강 변의 주민들은 지금은 하구둑으로 막혀버린 물길을 바라보며 옛 기억을 들추어내는데 버스가 드물던 시절 연락선은 가장 편리하고 중요한 대중 교통 수단이었다. 금강을 운행하는 여객선들의 정원은 80명 정도였지만 보통 정원을 초과하여 200명 정도가 승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다 승선은 1954년 성당에서 출발한 행운호가 서천의 지포 선착장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여 66명이 익사하는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하였는데 당시 사망자는 대부분 군산으로 통학하던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이 기억하는 연락선은 금강호, 강경호, 행운호, 연봉호, 화양호 등의 배들인데 여객선에 따라 경유지가 다르기는 하였으나 군산에서 강경까지 총 32개[강 남안 17개소, 강 북안 15개소]의 포구 중에서 17개[강 남안 6개소, 강 북안 11개소]의 포구를 경유하였다. 연락선이 경유한 포구를 행운호의 사례로 살펴보면 군산[째보선창]/망월리/걸음개[완포]/나포[나리포]/웅포/시음리/입포[갓개]/남당/칠산[부정기적]/강경을 운행하였다.

1900년대 금강을 이용한 여객 운송의 시작은 충청, 전라 지역 주민들의 생활 환경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동력선의 이용은 충청남도 강경에서 전라북도 군산까지의 금강 변 마을들을 자연스럽게 군산의 1일 생활권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강경에서 10시 경 출발한 강경호를 타고 3시간 만에 군산에 도착하여 3~4시간 일을 보고 오후 배를 이용하여 강경이나 다근이로 돌아가는 생활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여객선이 경유하는 포구들은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은 포구에 금강을 왕복하는 나루터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과, 포구에 객주가 거주하여 상거래가 활발했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앞서 언급한 특징들 때문에 여객선 경유지는 인근 지역의 경제적 중심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금강의 나루터]

나루터는 강을 사이에 둔 두 지역을 연결해주는 작은 무동력 선박을 운행하는 강변을 지칭한다.

읍지나 고문헌에서는 나루를 건너는 곳이라 하여 ‘진도(津渡)’라 표기하는데 일반적으로 나루터가 자리한 곳은 강의 폭이 좁은 곳으로 나루터로 인하여 자연 취락이 형성되어 자연스럽게 재래 시장의 기능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강 중상류의 내륙에 위치한 나루터의 형태이고, 강폭이 넓은 금강 하구에 자리한 나루터는 이와는 다르게 서해 바다와 가까운 지형적 이유로 먼저 포구가 형성되어 포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고 이렇게 형성된 포구 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강 건너편 포구 마을 사람들이 서로 경제적 필요에 의하여 나룻배를 운영하는 형태로 발전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이유로 금강 하구에 자리한 나루터는 포구와 함께 운영되고 객주들이 거주하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군산~강경 사이에 자리한 나루터는 10곳 정도로 파악되는데 그중에서 사람이 많이 이용하였던 나루는 군산포[군산창]~장암포, 경포[슬애]~용당진[용댕이], 입포[갓개]~제성 나루, 웅포[곰개]~신성리 나루, 강경~황산 나루 등 다섯 곳의 나루를 들 수 있다.

[기회의 땅 금강]

금강에 배가 다니던 시절 금강의 모습은 단순하게 행정 구역을 나누는 경계가 아니라 국가의 대동맥으로 힘차게 뛰며 우리 민족을 살찌우는 생명과 산업의 강(江)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잊혀진 강이 된 그곳은 20세기 초의 자연 환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기회의 땅으로 남아 있다.

서울과 인천을 한강이 연결하듯이 금강은 항구 도시 군산에게 있어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어머니의 탯줄과 같은 곳이기에 금강 수운의 개발은 서해안의 중추 도시를 꿈꾸는 군산의 마지막 개발자원이 될 것이다. 또한 관광 자원 측면에서도 신행정 수도와 백제 문화권 관광 단지를 새만금 방조제 및 고군산 국제 해양 관광 단지와 연계하는 허브 교통로로서 황금의 수로(水路) 역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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