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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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文書 |
영어의미역 | Old Document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에 전해 오는 전통 시대 문서.
[개설]
고문서는 일반적으로 발신인과 수신인(受信人)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기록물을 의미하지만 실제 고문서는 체계화되지 않은 단편적이고 일회적인 기록이라는 제한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문서는 점토판(粘土板)·나무·대나무·종이·백포(帛布)·피혁·금속·돌·흙 등을 재료로 하여 기록된 것을 모두 포함한다.
고문서의 분류는 문자 표기·시대별·공간 개념·발급자·내용 등의 기준에 의해 이루어진다. 문자 표기에 따라 한자와 이두, 국문, 국한문 혼용, 외국어 사료로 구분할 수 있다. 시대에 따라 고대·중세·근대별, 또는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고려 시대·조선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공간에 따라 국내와 국외로 나누고, 다시 국내를 중앙과 지방 사회의 문서로, 국외를 사대와 교린관계의 외교 문서로 분류할 수 있다.
발급자별로는 국왕 문서·왕실 문서·관부 문서·사인 문서·사사(寺社)·서원(書院)·도관(道觀)·결사(結社)·봉신불문서(奉神佛文書) 등이 있다. 수취인별로는 국서(國書)·교서(敎書)·교명(敎命)·유서(諭書)·교지(敎旨)·녹패(祿牌)·녹권(錄券)·상소(上疏)·차자(箚子)·소초(疎草)·비지(批旨)·차점(差岾)·초기(草記)·계(啓)·장계(狀啓)·서목(書目)·정사(呈辭)·천단자(薦單子)·윤음·관(關)·첩정(牒呈)·감결(甘結)·해유장(解由狀)·입안(立案)·조보(朝報)·상언(上言)·소지(所志)·고목(告目)·치통(馳通)·완문(完文)·초료(草料)·고음(侤音)·도목장(都目狀)·완의(完議)·공명첩(空名帖) 등으로 분류된다.
그 밖에 호구 단자(戶口 單子)·양안(量案)·시권(試券)·화회 문기(和會 文記)·노비 문기(奴婢 文記)·공인 문기(貢人 文記)·경주인 문기(京主人 文記)·수표(手標)·전당 문기(典當 文記)·유서(遺書)·간찰(簡札) 등이 있다.
한편 고문서의 내용에 따라 정치·외교·경제·종교·문화·국방·의식·토목 공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문서의 분류는 연구자가 중시하는 시대와 현존하는 고문서의 분량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나, 편의상 작성 발송자를 기준으로 하여 국가, 왕실, 중앙관청, 지방 관청, 사원, 서원, 기타 결사(結社), 호주와 개인, 외교 등의 항목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처럼 고문서는 시대에 따라서 그 양식과 내용이 변천을 거듭하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여 체계화시킬 필요성이 커지면서 고문서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만큼 고문서의 분류와 정리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고문서의 대부분은 양반 가문의 문서]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의 고문서는 「신라촌락문서」와 석탑 속에서 발견된 몇몇 사경 문서(寫經文書)를 제외하면 원본의 형태로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다. 고려 시대에도 금석이나 도제(陶製)로 된 묘지명을 제외하면 조선 시대에 정리한 일부 문벌가문의 가승(家承)과 사원에 노비를 기진한 문서 등이 일부 전할 뿐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우리나라 고문서는 조선 시대 중기 이후의 것이 대다수이며, 이 중에서도 19세기 이후의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동 지역의 고문서도 19세기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며, 주로 가문과 양반의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련된 고문서가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하동 지역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양반 가문은 선조에 대한 봉사(奉祀)를 후손의 가장 큰 임무로 알았으므로 가문의 유지와 명예, 그리고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관련 고문서를 소중히 여겼다. 이로 인하여 양반 가문의 고문서가 오늘날까지 전래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고문서로 완문(完文)·입안(立案)·뎨김[題音] 등 관부의 공증·판결·인정 등에 관한 문서와 재산 상속에 관한 분재기(分財記), 토지 노비의 매매 문기, 공인(貢人)·도장(導掌)·주인(主人) 계층의 권리 매매 문기, 사원에 대한 기진(寄進), 양반 가문의 위세와 명예에 관련된 녹권(錄券)·교서·유서(諭書)·유지(有旨)·사패(賜牌)·비답(批答) 등, 양반 가문의 위세와 실질적인 근거가 되는 준호구(準戶口)·호구 단자·명유(明儒)와의 왕복 간찰(簡札) 등이 전해지고 있다.
[종류와 특징]
하동 지역의 고문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2003년 이후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의 서부 경상남도 지역 고문헌 조사 연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경남문화연구원은 그 조사·연구 결과를 『경남 서부지역의 고문헌 자료조사』Ⅰ[2008]로 정리하였다.
하동 지역 고문서는 강연생 소장 고문서, 강인현 소장 고문서, 정두엽의 처 이씨 준호구, 장봉필 소장 고문서, 이재순 소장 고문서, 이남두 소장 고문서, 양보면 함창 김씨 호적류, 악양면 진주 정씨 호적류, 쌍계사 소장 고문서, 박용규 소장 고문서, 노영두 소장 고문서, 남영현 소장 고문서, 김휘겸 소장 고문서, 김종율 소장 고문서, 김봉규 소장 고문서, 김상구 소장 고문서, 화양정사 소장 고문서, 하민자 소장 고문서, 조양래 소장 고문서, 정흥식 소장 고문서 등이다.
하동 지역의 고문서는 소장처가 20곳이며, 모두 1,322건으로 호적류가 588건, 관부문서가 42건, 소지류가 25건, 교지류가 55건[박용규 소장 24건], 망기가 91건, 통문이 10건, 입안류가 2건, 제문이 7건 분재기가 3건 등이다.
하동 지역의 고문서 가운데 호적류가 가장 많으며, 18~19세기의 것이 대부분이나 17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자료적 가치가 높은 것도 발견되었다. 하동군 양보면 김상구 소장의 호적 자료 가운데 1627년(인조 5) 준호구가 주목된다. 이 호적은 하동현에서 발급한 김수번(金壽蕃)의 27세 때 준호구이다. 거주지는 서량곡리(西良谷里) 입암촌(立岩村), 본관이 함창(咸昌), 부가 근(墐), 조부가 홍진(弘振), 증조가 전(銓)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음으로 하동 지역 호적류로서 주목되는 것은 하동군 적량면 진주 정씨 소장의 준호구이다. 1675년(숙종 1) 곤양군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정두엽(鄭斗燁)의 32세 때의 준호구이다. 정두엽은 본관이 진주, 부가 희협(希俠), 조부가 이성(以誠), 증조부가 대수(大壽)라고 기재되어 있다.
하동군 금남면 이재순 소장의 분재기는 1750년(영조 26) 2월 25일의 「평균분금도문기(平均分衿都文記)」로 장자 호신(虎臣), 차자 성신(聖臣), 장녀, 차녀, 차녀, 차녀, 차녀, 처 김씨에게 재산을 나누어준 내용이어서 재산 상속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고문서이다.
[의의]
하동 지역의 고문서는 과거의 지역과 인물의 사실을 객관화시키고 종합하는 데에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편찬·편집류는 편찬자의 선입견이 개재되어 있고, 일기나 문집과 같은 저술은 저술자의 주관이 지배적이므로 신중한 접근과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반면에 호적 대장·양안(量案)·보첩(報牒)·지방 사례(事例)·등록(謄錄)류·노비·토지·가사매매·재산 상속에 관한 문계(文契)·문권(文券)과 문기(文記)·교지(敎旨) 등은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구조와 사건을 해명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귀중한 자료들이며, 당시의 역사적 사건을 결정적으로 해명해주거나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제1차 자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