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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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所藏古文書 |
영어의미역 | Old Documents Kept by No Yeongdu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전병철 |
소장처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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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노두수|박정한|박동수|이영오|노장의|이승두|노정섭|노광건|노수 |
용도 | 공문서|사문서 |
발급자 | 노두수|박정한|박동수|이영오|하동군수|화하면집강|평사동임|경모당|운암영당|횡천영당|하동향교|곤양작도정창건소 |
수급자 | 하동군수|노두수|화하면집강|평사동임|노동현|노정섭|노광건|노수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의 노영두가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구성/내용]
노영두 소장 고문서는 소지(所志) 3점, 의송(議送) 1점, 청원서(請願書) 6점, 첩(帖) 1점, 서목(書目) 1점, 전령(傳令) 2점, 고목(告目) 4점, 고시(告示) 10점, 망기(望記) 29점, 교지(敎旨) 9점, 경제 문서(經濟文書) 3점 등이다.
1. 소지, 청원서, 첩, 고목
소지에는 1904년(고종 41) 세 차례에 걸쳐 노두수(盧斗壽)가 하동군수에게 올린 소지 3점이 있다. 소지의 내용은 이영삼(李永三)과의 전답(田畓) 소송에 관한 것이다. 의송은 1904년 노두수가 하동군수에게 올린 것으로, 이영삼과의 전답 소송에 관한 내용이다.
청원서에는 1908년(순종 2) 박정한(朴正翰)이 하동군수에게 면장(面長) 사임을 요청하는 청원서 2점, 1908년 박동수(朴東洙)와 이영오(李永五)가 하동군수에게 금당평(金塘坪)·백지평(白旨坪) 등 진황지에 나무 심기를 요청하는 청원서 1점, 1908년 노두수가 하동군수에게 면장 사임을 요청하는 청원서 3점 등이 있다.
첩은 1905년(고종 42) 하동군수가 노두수를 춘향(春享) 석전제(釋奠祭) 때 사촉(司燭)에 차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목은 1904년 화하면(花下面) 집강(執綱)과 평사동임(平沙洞任)이 하동군수에게 올린 것으로, 본동의 이씨(李氏)·노씨(盧氏) 두 집안에게 무폐(無弊) 연유를 진술하도록 했다는 내용이다. 전령에는 1904년 두 차례에 걸쳐 하동군수가 화하평집강과 평사동임에게 보낸 전령 2점이 있는데, 노두수와 이영삼과의 전답 소송에 관한 내용이다.
고목에는 1904년 횡천영당(橫川影堂)에서 보내는 고목 1점[횡천영당 석채례 장찬(掌饌)에 추천하는 망기가 동봉됨], 1905년 유향소(留鄕所)에서 보내는 고목 1점, 1928년 경모당(景慕堂)에서 노장의(盧掌儀)에게 2월 15일 반수(班首)와 합석하도록 통보하는 고목 1점, 1931년 운암영당(雲巖影堂)에서 노도유사(盧都有司)에게 6월 15일 반수와 합석하도록 통보하는 하는 고목 1점이 있다. 고시로는 1908년 하동군수 이승두(李承斗)가 화하면장 노두수에 보내는 10점이 있다.
3. 망기
망기에는 1900년(고종 37) 금남사(錦南祠) 석채례(釋菜禮) 때 장의(掌儀)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09년(순종 3) 노두수를 향교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0년(순종 4) 노두수를 추향(秋享) 석전제(釋奠祭) 때 봉작(奉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1년 노두수를 악양정(岳陽亭) 석채례 때 찬창(贊唱)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1년 노두수를 춘향 석전제 때 분헌관(分獻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5년 노두수를 악양정 석채례 때 사준(司尊)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6년 노두수를 경천묘(敬天廟) 추향 때 진설(陳設)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6년 노두수를 경천묘 춘향 때 봉작(奉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17년 하동향교에서 노두수를 향교 춘향 석전제 때 동위준작(東位尊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0년 노두수를 악양정 석채례 때 사준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1년 노두수를 횡천영당 석채례 때 헌작(獻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2년 노두수를 금남사 석채례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2년 노두수를 악양정 석채례 때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3년 악양정 석채례 때 서위봉향(西位奉香)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3년 하동향교에서 노두수를 문묘 춘향 석전제 때 분헌관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4년 노두수를 운암영당 석채례 때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4년 노두수를 운암영당 석채례 때 직임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5년 운암영당 석채례 때 찬자(贊者)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6년 금남사 석채례 때 축관(祝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7년 금남사 석채례 때 봉향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7년 노두수를 운암영당 석채례 때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8년 봉산사(鳳山祠) 석채례 때 집사(執事)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28년 운암영당 석채례 때 진설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0년 곤양(昆陽) 작도정(鵲島亭) 창건소(創建所)에서 노두수를 곤양 작도정 창건소 도청(都廳)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1년 노두수를 운암영당 도유사(都有司)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6년 노동현(盧東鉉)을 악양정 석채례 때 사촉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6년 하동향교에서 노동현을 문묘 추향 석전제 때 서위봉작(西位奉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9년 노두수를 경천묘 추향 때 초헌관(初獻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2년 하동향교에서 노동현을 향교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이 있다.
4. 교지와 경제문서
교지에는 1893년(고종 30) 노정섭(盧廷燮)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우부승지 겸 공조참의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93년 노광건(盧光建)을 숭정대부(崇政大夫) 동지(同知) 겸 경연관(經筵官) 의금부(義禁府) 도총관(都摠管) 병조판서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93년 노수(盧秀)를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호조참판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93년 노두수를 통정대부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93년 노두수를 통훈대부(通訓大夫) 의금부도사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93년 유인(孺人) 이씨(李氏)를 정부인(貞夫人)에 봉하는 교지 1점, 1893년 유인 김씨(金氏)를 숙부인(淑夫人)에 봉하는 교지 1점, 1893년 유인 강씨(姜氏)를 정부인에 봉하는 교지 1점, 1893년 유인 강씨를 숙부인에 봉하는 교지 1점이 있다.
경제 문서에는 1946년 7월 13일 수급자 노득용(盧得用)으로 작성된 영수증 1점, 1946년 4월 1일 발급자 악양면장으로 작성된 영수증 1점, 발급자 김길순(金吉順)이 작성한 토지 매매 서신 1점이 있다.
[의의와 평가]
노영두 소장 고문서는 19세기 말의 교지부터 일제 강점기 및 해방 이후의 문서들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있으며,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경제 관련 문서로서 전답 관련 소송 내용을 담은 소지와 의송, 영수증, 토지 매매 서신 등이 있다. 일제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면서 토지 소유면에서 많은 분쟁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첩, 서목, 전령, 고목, 망기 등의 문서를 통해 이 가문이 하동의 유향 세력으로서 향임직을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노영두 소장 고문서는 조선 후기 이래의 다양한 문서 양식들 및 그 변화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