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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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所藏古文書 |
영어의미역 | Old Documents Kept by Nam Yeonghyeon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
시대 | 근대/근대,현대/현대 |
집필자 | 전병철 |
소장처 |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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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남상현|남정기|남정탁|남주희|남상복|남상익|남인우|남렴|남덕현|남내순|남성희|남은희|남창회|남장우|남기종|남상기|남재우 |
용도 | 공문서|사문서 |
발급자 | 남상현|남정기|남정탁|남주희|하동도호부사|현령|악양정|운암강당|하동향교|관어재|호상정|경모당|남상복|남상익|남인우 |
수급자 | 남렴|남덕현|남내순|남주희|유인강씨|유인김씨|유인이씨|남성희|남상현|숙인민씨|양운|하동도호부사|관찰사|남은희|남창회|남장우|남기종|남상기|남재우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적량면의 남영현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구성/내용]
남영현 소장 고문서는 신고 서책(申告書冊) 1책, 소지(所志) 4점, 상서(上書) 2점, 첩(帖) 4점, 망기(望記) 24점, 통문(通文) 2점, 교지(敎旨) 14점, 경제 문서(經濟文書) 20점 등이다.
1. 신고 서책, 소지, 첩
신고 서책은 1911년 7월 28일자의 소유지 신고서로, 당시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관련하여 농촌 현장에서의 신고 내용을 생생히 보여주는 자료이다.
소지는 1881년(고종 18)과 1882년(고종 19) 네 차례에 걸쳐 올린 소지 4점이 있는데, 남정기(南廷基)·남정탁(南廷鐸)이 하동도호부사에게 좌수(座首) 김기현(金奇鉉)과 천주(薦主) 김준룡(金俊龍)이 향임에 선임되는 사람들에게 책임전(責任錢)을 과다하게 부과함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또한 1882년 두 차례에 걸쳐 올린 상서 2점이 있는데, 남정기와 남정탁이 관찰사(觀察使)에게 책임전을 과다하게 받은 좌수와 천주를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다.
첩에는 1884년(고종 21) 하동도호부사가 남은희(南殷熙)를 유향별감(留鄕別監)에 차정하는 첩 1점, 을묘년 현령(縣令)이 남창회(南昌會)를 유향별감에 차정하는 첩 1점, 병진년 현령이 남창회를 유향좌수(留鄕座首)에 차정하는 첩 1점, 기해년 현령이 남창회를 유향별감에 차정하는 첩 1점이 있다.
2. 망기
망기에는 1931년 남상현(南相現)을 악양정(岳陽亭) 석채례(釋菜禮) 때 동위준작(東位尊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6년 남상현을 악양정 석채례 때 봉향(奉香)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39년 남상현에게 보낸 망기 1점, 1939년 하동향교에서 남장우(南章佑)를 향교 재임(齋任)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0년 남상현을 금남사(錦南祠) 석채례 때 사준(司尊)의 직임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0년 하동향교에서 남장우를 추향(秋享) 석전제(釋奠祭) 때 동위봉작(東位奉爵) 겸 준작(尊爵)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1년 악양정에서 남장우를 악양정 석채례 때 봉향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1년 하동향교에서 남상현을 문묘(文廟) 춘향 석전제 때 분헌관(分獻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2년 하동향교에서 남재우(南再祐)를 문묘 춘향 석전제 서무봉향(西廡奉香)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3년 남상현을 운암영당(雲巖影堂) 석채례 때 장의(掌儀)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3년 악양정에서 남상현을 악양정 석채례 때 헌자(獻者)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43년 하동향교에서 남상현을 문묘 추향 석전제 때 종헌관(終獻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51년 경모당(景慕堂)에서 남상현을 금남사(錦南祠) 춘향 석채례 때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61년 경모당에서 남장우를 경천묘(景天廟) 춘향 때 진설(陳設)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61년 관어재(觀魚齋)에서 남장우를 경의사(景義祠) 향례(享禮) 때 찬창(贊唱)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61년 하동향교에서 남장우를 향교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62년 악양정에서 남장우를 덕은사(德隱祠) 석채례 때 사준에 추천하는 망기 1점, 1962년 운암강당(雲巖講堂)에서 남장우에게 운암영당의 도유사(都有司)에 추천하는 망기 1점, 계유년 남재우를 금남사 석채례 때 봉향에 추천하는 망기 1점, 을유년 하동향교에서 남상기(南相沂)를 문묘 추향 석전제 때 사촉(司燭)에 추천하는 망기 1점, 임오년 악양정에서 남재우를 악양정 석채례 때 동위준작에 추천하는 망기 1점, 임인년 호상정(湖上亭)에서 남기종(南基鍾)을 호상영당(湖上影堂) 향례 때 봉향에 추천하는 망기 1점, 임자년 하동향교에서 남기종을 향교 장의에 추천하는 망기 1점이 있다.
3. 통문, 교지, 경제문서
통문에는 남상복(南相馥)·남상익(南相翌)이 의연금(義捐金)과 관련하여 보낸 통문 1점, 종손 남인우(南麟祐)가 파보(派譜) 발행에 관련하여 보낸 통문 1점이 있다.
교지에는 1883년(고종 20) 남렴(南濂)을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83년 남덕현(南德顯)을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83년 남내순(南來舜)을 가선대부(嘉善大夫) 겸 한성좌윤(漢城左尹)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83년 남주희(南周凞)를 가선대부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883년 유인(孺人) 강씨(姜氏)를 정부인(貞夫人)에 봉하는 교지 1점, 1883년 유인 김씨(金氏)를 정부인에 봉하는 교지 1점, 1883년 유인 이씨(李氏)를 정부인에 봉하는 교지 1점, 1907년(순종 1) 남성희(南聖熙)를 동명왕릉참봉서판임관팔등(東明王陵參奉敍判任官八等)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908년(순종 2) 남성희를 중추원의관 서판임육등(中樞院議官敍判任官六等)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908년 남성희를 성균관박사 서판임관팔등(成均館博士敍判任官八等)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908년 남상현을 건원릉참봉 서판임관팔등(健元陵參奉敍判任官八等)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908년 남성희를 정삼품 통정대부 비서감승(正三品通政大夫秘書監承)에 임명하는 교지 1점, 1908년 숙인(淑人) 민씨(閔氏)를 숙부인(淑夫人)에 봉하는 교지 1점, 1909년(순종 3) 양운(梁云)을 학부주사 서임관팔등(學府主事敍判任官八等)에 임명하는 교지 1점이 있다.
경제 문서에는 1916년 11월 16일 발급자 남상현으로 작성된 증명제(證明濟) 3점을 포함한 모두 14점이 전한다. 또한 대정(大正) 연간에 발급자 남상현이 작성한 신고서(申告書) 2점을 포함하여 모두 6점이 전한다.
[의의와 평가]
남영현 소장 고문서는 19세기 말부터 1960년대까지 긴 기간에 걸쳐 있다. 눈에 띄는 것은 경제 관련 문서로는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관련하여 농촌 현장에서의 신고 내용을 생생히 보여주는 신고 서책과, 일제 강점기의 달라진 토지 소유를 보여주는 증명서, 신고서 등이 있다. 또한 소지와 상서는 조선 후기 금전으로 향임직에 임명되었음을 실증하는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
이외 첩과 망기에서는 남영현의 집안이 하동의 유향 세력으로서 조선 후기 이래 1960년대까지 향임직에 임명되었고, 지역의 제향관과 향교의 장 등으로 활약했음을 보여준다. 남영현 소장 고문서는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한 집안의 역사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질 뿐 아니라 각 시대별 주요 사안을 포함하는 문서들로서 사회 경제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