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30 |
---|---|
한자 | -所藏古文書 |
영어의미역 | Old Documents Kept by Gim Sang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근대 |
집필자 | 전병철 |
소장처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
---|---|
성격 | 고문서 |
관련 인물 | 김계윤|김학기|김만성|서유민|김시처 |
용도 | 공문서|사문서 |
발급자 | 김계윤|하동부사|하동군수|횡천영당|하동향교|옥산재회소|경천묘|반남선생문집간소|악양정|일두선생실기중간소|금남사|덕천사|서유민 |
수급자 | 김계윤|김학기|김만성|김시처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의 김상구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고문서.
[제작 발급 경위]
함창 김씨 집안의 개인 및 수령의 필요에 의해 제작, 발급되었다. 소지(所志)는 김계윤(金啓潤)이 투장(偸葬)[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에 대해 관청에 호소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첩(帖)은 하동부사가 김계윤 및 김학기(金學基)를 제향관에 임명하기 위한 문서이다. 고목(告目)은 횡천영당(橫川影堂)에서 김학기를 제향관으로 추천한 것이며, 망기(望記)는 김학기를 제향관이나 향교의 직임에 추천하기 위한 것이다. 수표(手票)는 약속 증서이며, 허여입후명문(許與立后明文)은 양자를 세우기 위해 만들었다.
[구성/내용]
김상구 소장 고문서는 소지 3점, 첩 4점, 고목 1점, 망기 21점, 수표 1점 등이다. 이외에도 호적류에 해당하는 고문서가 있다. 소지는 1894년(고종 31) 김계윤이 하동부사에게 투장에 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첩에는 1845년(헌종 11) 하동부사가 김계윤을 추향(秋享) 사직대제(社稷大祭) 때 초헌관(初獻官)의 직임에 차정하는 첩 1점, 1891년(고종 28) 하동부사가 김학기를 춘향(春享) 석전제(釋奠祭) 때 봉로(奉爐)의 직임에 차정하는 첩 1점, 1901년(고종 38) 하동군수가 김학기를 추향 석전제 때 봉작(奉爵)의 직임에 차정하는 첩 1점, 1906년 하동군수가 김학기를 춘향 석전제 때 집례(執禮)의 직임에 차정하는 첩 1점 등이 있다.
고목은 1910년 횡천영당에서 김학기를 영당 석채례(釋菜禮) 때 집례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이다. 망기에는 1890년(고종 27) 하동향교(河東鄕校)에서 김학기를 재임(齋任)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03년 하동향교에서 김학기를 장의(掌儀)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05년(고종 42) 횡천영당에서 김학기를 석채례 때 진설(陳設)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07년 횡천영당에서 김학기를 석채례 때 사준(司尊)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07년 김학기를 향약공사원(鄕約公司員)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09년 옥산재회소(玉山齋會所)에서 김학기를 만동묘수계(萬東廟修契)에 유사(有司)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10년 김학기를 경천묘(敬天廟) 추향(秋享) 때 집례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10년 김학기를 반남선생문집간소(潘南先生文集刊所)의 감동(監董)에 추천하는 내용, 1910년 김학기를 악양정(岳陽亭) 석채례 때 장의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01년 김학기를 횡천영당의 석채례 때 집례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15년 김학기를 경천묘 춘향 때 아헌관(亞獻官)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17년 하동향교에서 김학기를 추향 석전제 때 동위사준(東位司尊)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17년 옥산재회중(玉山齋會中)에서 김학기를 포은정선생영정(圃隱鄭先生影幀)을 다시 봉안하는 때에 배종(陪從)하는 유사(有司)로 추천하는 내용, 1918년 남계서원회중(濫溪書院會中)에서 김학기를 일두노선생실기중간소(一蠹老先生實記重刊所)의 장물(掌物)에 추천하는 내용, 1921년 김학기를 경천묘 춘향의 초헌관(初獻官)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22년 김학기를 금남사(錦南祠) 석채례 때 헌자(獻者)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22년 김학기를 석채례의 헌관(獻官)에 추천하는 내용, 1927년 김학기를 덕천사수계(德川祠修契)의 향유사(鄕有司)에 추천하는 내용, 1928년 김만성(金萬成)을 금남사 석채례 때 찬자(贊者)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29년 김만성을 경천묘 춘향 때 대축(大祝)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1930년 김학기를 금남사 석채례 때 헌자의 직임에 추천하는 내용 등이 있다.
수표는 갑오년 11월 초9일 총주(塚主)에 관한 내용으로 서유민(徐有敏)이 발급한 것이다. 허여입후명문은 1797년(정조 21) 11월 28일 유학(幼學) 김시처(金始處)를 계자(系子)로 세운다는 내용의 명문(明文)이다.
[의의와 평가]
김상구 소장 고문서는 1797년 허여입후명문부터 1930년의 망기까지 140여 년에 걸쳐 작성되었으며, 문서의 종류도 첨, 고목, 망기 등 임명 관련 문서, 소지 같은 고소장, 수표와 입후 명문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를 통하여 함창 김씨 집안이 하동의 재지 사족으로서 지역의 제향관이나 향교 직임을 적극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향임직에 임명하는 주체가 수령이라는 점에서 국가의 지방 장악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투장 관련 문서는 이 시기 조상 숭배와 풍수지리 사상이 묘하게 결합하여 각지에서 수없이 일어났던 산송(山訟)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입후 명문 역시 부계 계승 의식이 확고해지면서 이 시기 양자제가 보편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상구 소장 고문서는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치는 사회사, 가족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