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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358
한자 城郭
영어의미역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집필자 박용국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흙이나 돌로 축조한 방어 시설.

[개설]

성은 집단의 공동 목적과 더불어 소수의 수비군이 다수의 침략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거나 침공 속도를 늦추어 후방이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얻기 위한 방어용 건축물이다. 따라서 성은 인류 역사에서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발생하고, 국가가 성립하면서 나타나는 환호(環濠)와 목책과 같은 방어 시설, 습지에서 발달한 환호취락(環濠聚落), 구릉을 활용한 토성 등에서 시원을 찾을 수 있다. 성곽(城郭)은 네모꼴의 성(城)과 그 성을 에워싼 곽으로 구성된 이중의 방어 시설인데, 성을 내성(內城), 곽을 외성(外城)이라고도 한다.

고대 국가가 성립하면서 성곽이 발생하고, 우리나라의 특징적인 방어 시설로서 산성이 축조되고 정착됨에 따라 한국의 특징적인 도성 체제가 형성되어 갔다. 고구려는 첫 도읍지인 환인(桓因)[집안]에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축조하였으나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평지의 국내성과 배후의 환도산성을 구축하였다.

고구려는 평양으로 천도한 후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한 형태인 청암리토성과 대성산성을 축조하였다. 백제는 궁성과 시가지 및 배후의 산성을 포괄하는 나성(羅城)을 갖춘 도성 체제를 구축하였다. 반면에 신라는 하천을 끼고 환호를 갖춘 구릉에 왕성을 구축하고, 왕도의 주요한 길목에 산성을 갖추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 이르러 5소경이 정립되면서 낮은 구릉의 읍성과 그 배후의 산성으로 이루어지는 배치가 정형화되었다.

고려 시대에도 개경의 높지 않은 산허리의 왕성은 거란 침략 이후 나성을 두른 이전의 도성의 형태와 유사했으며, 삼국 시대의 장성을 이어 고려 시대에도 장성을 축조하였다. 발해는 내·외성의 남문을 연결하는 주작대로(朱雀大路)를 가진 중국식의 평지 방형성을 구축하였다.

여말 선초 연해 지방의 읍성·진보, 북쪽 변경의 행성·진보의 축조에 따라 내륙 산성의 기능이 점차 상실되었다. 화약과 화포의 사용으로 말미암아 성벽이 낮아지고, 평지의 읍성이 산성에 못지않은 비중이 커지자 세종(世宗) 때부터는 방어의 능률을 위해서 옹성·해자·적대가 의무화되었다. 이리하여 산성도 비교적 규모가 큰 것만 남고 작은 산성들은 폐기되어갔다.

성종(成宗) 때부터 연해 지방의 진보마다 군량과 병기를 둘 성보(城堡)가 축조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 시대 방어 체제는 대규모의 외적 상륙에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은 중국식과 왜식 성의 장점에 주목하는 계기이자 우리의 전통적 축성 방법도 반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수원화성의 축조였다.

하동 지역의 성곽은 읍성과 산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성은 유사시 고을의 민을 보호하기 시설이면서 도성(都城)을 방어하기 위해서 주요한 길목에 쌓은 것이다. 읍성은 적의 침략 시 관아(官衙)와 고을의 인적·물적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성되었다. 하동 지역은 1417년(태종 17)에 쌓은 고현성(古縣城)이 유일한 읍성이며, 1703년 읍치가 옮겨간 후 무너져 있던 것을 최근 복원하였다. 산성은 고소성, 고성산성, 박달리 성지, 금오산성, 통정리 산성, 민보성, 정개산성 등이 있다.

[관련 기록]

하동 지역의 성에 관해서 읍성에 관한 기록은 보이나 산성에 관한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문종실록(文宗實錄)』에는 주위가 2,943척, 높이가 평지에는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女墻)의 높이가 3척, 적대(敵臺)가 11개소인데 이중 이미 쌓은 곳이 4개소이며, 문이 3개소에 옹성(擁城)이 있고, 해자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31, 경상도 하동현의 성곽조(城郭條)에는 “읍성(邑城)이 있다. 현에는 옛날에 성이 없었는데, 우리 세종(世宗) 정유년에 양경산(陽慶山) 밑에다가 돌로 쌓았다. 둘레는 1,019척이고, 높이는 13척이며, 성 안에 우물 다섯과 못 하나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하동현 성지조(城池條)에서는 “도호부에는 성이 없고, 고읍(古邑) 양경산 아래에 성곽이 있다. 세종조 정유년 석축을 쌓았다. 성의 둘레가 1,019척이고, 높이가 13척인데, 성 안에 우물이 다섯 곳, 못이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무너져 폐해졌다. 도호부의 남쪽에 용지(龍池)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하동의 성곽 관련 기록에 착오가 있다. 위의 두 기록에는 “고읍 양경산 아래에 성곽이 있다”라고 하면서 “세종조 정유년 석축을 쌓았다”고 하였다. 축성 연대를 1417년 정유년으로 밝혀놓았으나 정유년은 세종조가 아니라 1417년(태종 17)이었다. 산성에 관한 기록을 보면 극히 단편적이다. 『여지도서』의 하동부읍지(河東府邑誌) 고적조(古蹟條)에 “악양은 부에서 서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고소성이 있다”라고 하였다. 고소성의 기록은 대개 이 정도에 불과하다.

[하동읍성]

하동읍성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산 114-9번지 고하마을에 있다. 남해안 일대는 여말 선초 왜구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하여 여말 선초 산성을 중심으로 왜구에 대한 방어를 하였으나 1415년(태종 15)부터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중심으로 연해읍성(沿海邑城)과 진보(鎭堡)를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왜구를 해안선에서 막아 백성과 재화를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방어책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동읍성도 그러한 일련의 상황과 연계하여 축성된 연해읍성 중의 하나였다. 이 성은 조선 시대 정유년 1417년(태종 17)에 축성된 것으로 기록에 전한다.

하동읍성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양경산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성곽이 하동읍성으로, 주변의 산석을 이용하여 쌓아올렸다. 하동읍성은 멀리 남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고, 금오산의 봉수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연해읍성이었다.

하동읍성은 석축의 너비가 2~3m, 높이가 3~5m 정도인데, 당시 성의 둘레가 1,019척, 높이가 13척이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우물이 5개, 연못이 1개 있었다. 『문종실록』에는 주위가 2,943척, 높이가 평지에는 8척, 높고 험한 곳은 7척이며, 여장(女墻)의 높이가 3척, 적대(敵臺)가 11개소인데 이중 이미 쌓은 곳이 4개소이며, 문이 3개소에 옹성(擁城)이 있고, 해자는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동읍성은 최근 시굴이 이루어졌으며, 2004년 5월 31일 사적 제453호로 지정되었다.

[하동 고소성]

하동 고소성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 31번지 일대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고소성하동군 하동읍에서 국도 19호선을 따라 약 11㎞쯤 가다보면 악양 들녘 북서쪽 끝 섬진강 변 오른편 산록에 위치하여 섬진강의 물길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쌓은 산성이다.

고소성은 촛대봉에서 이어져 내려온 지리산의 험한 줄기가 신선봉에 이르고 그 남서편 산줄기의 해발 300m 지점에 위치하는 지형을 이용하여 크고 견고하게 쌓은 석축산성으로 평면상으로 보면 야구장의 형태를 띤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쌓았다. 서남쪽 섬진강을 굽어보는 부분을 제외한 부분의 성벽이 상당한 정도로 보존이 되었으며, 현재 전체 성벽이 복원되었다. 고소성은 둘레가 약 436m이다. 고소성은 1966년 9월 6일 사적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

하동 북방리 고성산성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산 13-1번지 정상부에 축조된 조선 시대 산성이다. 고성산성은 동북쪽으로 덕천강을 끼고 있고, 동남쪽 일부를 제외하면 주변 2㎞ 이상을 한 눈에 조망(眺望)할 수 있는 지세(地勢)에 쌓은 산성이다. 고성산의 정상부 능선을 따라 쌓았으나 축성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1770년대까지 성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고 한다. 고성산성고성산[일명 고승당산][186m]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 산성이다. 고성산은 능선 곳곳에 암벽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자연 암벽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현재 약 600m 정도 남아 전하고 있다.

성곽은 동학 운동 위령탑에서 북서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현존 길이 남북 12m, 동서 7.7m, 높이 2.2m 정도 확인 가능하다. 고성산성은 1894년 진주 지역의 동학 농민군 5,000명이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상대로 처절한 전투를 벌여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패퇴하였던 항일 전적지이다. 고성산성은 1994년 7월 4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박달리 성지]

박달리 성지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 산 111번지에 남아 있는 산성으로 해발 160m에 위치한다. 박달리 성지남해에서 곤양군의 봉계원(십오리원)과 진주목 서부 내륙의 정수역으로 이르는 길목의 산성에 해당한다. 박달리 성지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긴 타원형인데 편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산성이 무너져 내린 폭 4.5m의 흔적으로 성의 높이를 짐작할 수 없으며, 다만 성의 둘레가 약 600m임을 확인할 수 있다.

초석의 크기가 장방형으로 치석된 115㎝×80㎝, 65㎝~60㎝인 점으로 보면 잘 다듬은 장방형의 초석 위에 산석을 쌓는 형태의 산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초석으로 생각되는 석조물과 초석에도 기둥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지표상으로는 건물지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전도리 성지]

전도리 성지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전도리 산 59번지 섬진강 변의 구릉 상에 위치하는 축성 시기 미상의 성지이다. 전도리 성지섬진강 하구 동안의 구릉에 위치한 산성이다. 전도리 성지는 위치상에서 보면 섬진강 하구의 천연의 요새에 자리하고 있어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하동읍성[고현성] 등 하동군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성은 허물어져 황폐한 상태이며, 산석으로 이루어진 그 폭이 약 8m에 이른다. 성은 구릉의 북쪽 정상부를 중심으로 반원형이며, 길이는 약 700m이다.

[금오산성]

금오산성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금오산[849m]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려 말에 축성된 산성이다. 산성 내에 봉수대가 있으며, 남해안의 왜구 침입에 대비해서 쌓은 성곽으로 전하고 있다. 성곽이 대부분 허물어져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산 정상에 있으며, 봉우리를 에워싼 테뫼식 산성이다.

[민보성]

민보성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송문리 산 141번지 일대에 쌓은 조선 시대 산성이다. 남으로 노량 앞바다, 남동으로 남해대교를 바라다보고 있는 성으로서 해발 100m 내외의 산 정상부 주위를 돌려 쌓은 발권식 산성이다. 성은 지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설치되었는데, 남벽만 비교적 양호할 뿐 대부분 허물어진 채 문지의 확인도 불가능한 상태이다. 정상부 근처에 건물지 1개소와 우물이 남아 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550m이며, 추정 가능한 성벽 높이는 6m 전후로서 침입을 대비한 초소, 또는 망루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하동 지역의 산성으로 악양면에는 신대리 뒷동산의 구성(龜城), 북쪽 맞은편 정서리 솔봉산에 삼한 시대 토성으로 알려진 다사성(多沙城)이 있으며, 고전면에는 매자골의 노봉산성(老峯山城), 전도리소란산성(小卵山城), 성천리정안봉 산성양보면 장암리에 걸쳐 있다.

하동군 금성면 궁항리두우산성(頭牛山城)은 삼국 시대 석성으로 알려져 있고, 금남면 노량리 뒷산에 있는 연봉산성(蓮峯山城)은 조선 후기 석성이라고 하며, 횡천면 남산리 원곡산[130m]에 있는 원동산성(院洞山城)은 고려 후기 석성이라고 한다. 진교면 월운리 이명산 천왕봉 정상에 있는 이명산 성지는 고려 후기 석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옥종면 종화리 모방곡의 정개산[520m]에 있는 정개산성은 1596년(선조 29) 체찰사 이원익의 명으로 진주목사 나정언이 정개산정에 방책을 만들고 돌과 흙을 섞어서 토성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주위의 산세가 험준하고 요새로서의 기능을 발휘 할 수 있었으나 성이 미처 완성되기 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의 침입을 받아 성이 와해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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