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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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45년 해방 이후 경상북도 청도군의 역사.
[개설]
한국사에서 시대 구분상 1945년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부터 남북한 분단, 6·25 전쟁,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으며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 성숙을 가져왔다.
[해방∼1950년대]
1945년 8·15 해방 직후 청도군에는 1945년 8월 20일 경 군민 대회를 거쳐 건국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어 지역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1945년 10월 13일 청도에 진주하여 미군 장교가 군수로 부임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의 존재는 부정되고 미군정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당시 청도군청의 조직 구성은 내무과, 산업과, 보건 후생과 3과와 9개 읍면을 관할하고 있었다. 한편 청도군의 행정 구역 변동으로는, 1940년 11월 개편·개칭된 청도면이 1946년 8월 13일에 청도읍으로 승격되었다.
1948년 UN으로 한국 문제가 이관되면서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한국 민주당 소속 박종환(朴鍾煥)이 제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청도군은 운문산과 비슬산 일대를 거점으로 지서 습격·방화·경찰 살인과 신기 부락 사건·부야리 사건·화악산 사건 등 민간인 학살을 감행하는 등 빨치산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 중 하나였다. 1950년 6·25 전쟁이 발생하자 청도 지역은 정규군간의 충돌과 극심한 혼란은 일어나지 않은 미해방 지역에 속했다. 다만 전선(戰線) 후방을 교란할 소지가 있는 잠재적 적(敵) 제거 차원에서 청도군에서도 7월 초순경부터 보도 연맹원을 중심으로 예비 검속을 시작하여 청도 용각산과 경산시 폐코발트 광산, 군내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살해되었다. 또한 빨치산들의 활동도 고조되었다.
특히 전쟁 동안 청도군에는 약 40여 만 명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전쟁 피난처로서 기능을 하였다. 이들은 운문면 대천교 부근의 하천에서부터 금천면 일대, 매전면, 유천에 이르는 동창천 전역, 청도천 유역의 일부 하천변 등에서 피난 생활을 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6·25 전쟁 기간 중인 1952년 4월 25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지방 자치 단체 선거가 실시되어 군민들에 의해 군내 9개 읍·면 의원이 선출되어 초대 의회가 구성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현재]
우리나라는 1960년대 들어 4·19 혁명을 비롯하여 1961년 5·16 군사 정변, 1972년 10월 유신 등의 정치적 격변과 더불어, 1962년부터 실시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1972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하여 경제적 성장을 이룩하였다.
청도군의 행정 구역 변동 사항으로는 1974년 청도읍의 유호(楡湖), 화양면의 남성현(南省峴) 2개 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6년 5월 8일 도주관(道州館)에 있던 화양면사무소가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후 1979년 5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5월 1일 이서면 고면리가 흥선리(興善里)로, 청도읍 구미리(九尾里)가 구미리(龜尾里)로 개칭되었다. 1992년 1월 1일에는 금천면 방지리 일부가 운문면에 편입되어 운문면 방지리가 신설되었다.
우리나라 사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새마을 운동은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가 발상지이다. 1969년 8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은 경남 수해 복구 현장 시찰 차 부산으로 향하던 중 청도읍 신도 마을 경부선 철로 변에서 주민 전체가 동원되어 제방 보수 작업을 하는 것을 열차를 정차시켜 10여 분간을 지켜보았다. 울창한 산림, 개량된 지붕, 잘 닦인 마을길, 마을 주민의 협동 정신 등 박정희 대통령은 신도 마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8개월 뒤인 1970년 4월 22일 부산에서 개최된 한해 대책 전국 행정 기관 회의에서 신도 마을 사례를 소개하면서 같은 해 5월부터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1970년 9월 대통령 비서실에서 발간된 국토 보전 화보집 속표지를 신도 마을이 장식하면서, ‘국토 보존 사업’ 시범 지구 선정, 1972년 7월 15일 대통령 표창 수상과 함께 전국 각계 각층 인사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되었다.
청도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9년 4월 14일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관을 건립하여 새마을 운동 추진 방향을 제시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청도군에서는 새마을 운동 발상지 품격 제고 차원에서 신도 마을 성역화와 체험 공간 농촌 테마 파크를 2014년까지 준공할 예정이다.
1980년대 청도군은 다양한 분야에서 개발을 진행하여 지역 사회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그 일환으로 건천∼창녕과 제20호 국도 확장·포장, 이서면∼대구 연결 지방도 확장·포장, 각북면∼대구 연결 도로 개설, 금천면∼경산 연결 도로 확장·포장과 화양읍과 청도읍 취수원이 건설되어 생활의 질 개선에 일조하였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문화 행사 도주 문화제(道州文化祭) 발전, 각북면 청도 차산 농악의 경상북도 시도 무형 문화재 제4호 지정, 군조(郡鳥)·군화(郡花)·군목(郡木) 제정, 청도 군민 회관·각남·각북 면민 회관 등이 준공되면서 지역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90년대에 30년 만에 지방 자치제가 부활하면서 1991년 3월 26일 제1대 청도군 초대 군 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9명의 군 의원을 배출하였다. 1995년 6월에는 청도군 초대 민선 군수 선거가 실시되었다.
2000년대 청도군은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전원 관광 도시로 자리 잡는데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먼저 팔조령과 곰티재 터널이 개통되면서 교통권이 크게 개선되었고, 청도 반시 산업화·한재 미나리 명품 단지 조성 등 지역 농업 특성화 사업을 육성하여 지역민의 소득 증대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문화 분야에서 진전이 두드러지는데 청도 문화·체육 타운 건립, 청도 소싸움 민속 문화 테마 파크 건립, 청도읍성 복원, 청도 야외 공연장 건립 등 다양한 문화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여 관광객 유치를 기하고 있다.
2012년 현재 민선 5기 청도군의 군정 방향은 ‘세계 일류 전원 도시’로 정하고 ‘살맛나는 풍요 청도’, ‘다시 찾는 관광 청도’, ‘따뜻한 복지 청도’, ‘활기찬 경제 청도’ 목표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다. 행정 구역은 2읍 7면 2출장소[212개 리, 398개 자연 부락, 1,006개 반]이며 행정 조직은 1실과 12과 2소 1센터, 2읍 7면 2출장소로 구성되어 있다. 인구는 2011년 12월 31일 현재 2만 397가구에 인구는 4만 4298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