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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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韓遊擊隊 |
이칭/별칭 | 빨치산,야산대,공비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6·25 전쟁 당시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 있었던 북한 게릴라 부대.
[설립 목적]
1949년 7월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은 남한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유격 투쟁을 조직적이며, 대규모로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유격대에 대한 일원적 지휘는 박헌영의 지도 아래 이승엽이 관장하였다.
남조선 인민 유격대는 빨치산, 야산대(野山隊), 공비(共匪), 공산 게릴라, 산사람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변천]
1946년 5월에 미소 공동 위원회의 협상 결렬, 대구 10월 항쟁, 2·7 사건 등을 거치면서 남한 내 모든 좌익 세력들이 불법화되었다. 이후 남로당 방침에 따라 무장 게릴라 조직인 남조선 인민 유격대가 전국적으로 5개 유격 지구에서 결성된다. 이때 청도군은 영남 유격 지구에 편성되었다. 1952년 국군 제875 부대가 운문사에 주둔해 토벌 작전을 시작하면서부터 1953년까지 유격대는 완전 소탕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운문산과 비슬산이 위치한 경상북도 청도군은 주로 깊은 산중에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유격대의 특성상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강력한 유격대 군당이 형성되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구 주둔 제6 연대의 반란 가담자 일부가 운문산과 비슬산 등지로 유격대에 합류하면서 청도 지역 유격대 활동은 더욱 강화되었다.
1948년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남조선 인민 유격대 청도 군당은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전개하면서 청도 지역의 밤은 유격대의 세상이 되었다. 군경의 통신 체계 교란 목적으로 전신주·경비 전화선을 절단하고 경찰서 및 관공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또한 밤에 마을로 내려가 좌익 사상 선전·교육 및 식량과 생활 용품 약탈이 이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유격대에 의한 살상·방화 사건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다음 두 사례를 통하여 유격대가 자행한 민간인 살상의 만행을 확인할 수 있다. 1949년 음력 4월 28일에 남양 2리 주민들은 마을 뒷산에 수상한 사람 1명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을 민보단 및 청년들이 주동이 되어 이를 생포한 다음 매전 지서에 인계하였다. 1949년 5월 25일 밤 11시경 유격대 생포 작전에 공로가 컸던 마을 주민들을 포상한다는 명분으로 10여 명의 국군 복장을 한 유격대들이 마을에 들어와 당시 생포 작전에 참여했던 주민 모두를 동사(洞舍)에 소집시킨 후 주민 7명을 살해하였다.
또한 1949년 여름,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부야리에서 마을에 침입한 유격대 1명을 체포하여 서울 헌병대 본부로 압송해 간 일이 있었다. 1949년 11월 19일 밤 국군 복장을 한 유격대원들이 마을에 들어와 마을 경비원 9명을 살해하고 시체에 불을 지르는 행동에 이어 방화와 약탈을 행하고 떠났다.
이러한 이유로 대구 주둔 제3 여단 제6 연대를 비롯한 여러 부대가 파견되어 지속적인 토벌 작전을 수행했고, 특히 과거 좌익·공비 출신들로 구성된 땅벌 부대의 공로가 빛났다.
1950년 11월 중순경 유격대 근거지 중 한 곳인 가지산 학소대 골짜기를 포위 공격하여 운문산 빨치산 대장으로 활동하던 7명을 생포하였다. 그 후 잔당들은 오진리 웅기산 유격대와 제휴하면서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다가 1952년에 국군 제875 부대가 운문사에 주둔해 토벌 작전을 시작하면서부터 1953년에 완전 소탕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조선 인민 유격대 청도 군당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통신 체계 교란, 관공서 습격, 우익 세력 살상, 좌익사상 선전·교육 등 해방 정국과 전선의 후방 교란 작전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