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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산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498
한자 華岳山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3월 9일연표보기 - 화악산 사건 발생
성격 빨치산 보복 사건
관련 인물/단체 박재환

[정의]

1950년 3월 9일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사리 경비원 및 주민들이 빨치산 의해 보복 살해당한 사건.

[개설]

경상북도 청도군은 험준한 지형적 원인으로 6·25 전쟁 이전부터 빨치산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이었다. 화악산(華岳山)은 일명 둔덕산(屯德山)이라 불리며, 청도 산서 지방에는 비슬산을 위시해여 화악산, 남산, 용각산, 철마산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악산도 이런 지리적 영향으로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했다.

[역사적 배경]

청도군 각남면 사리 마을은 화악산남산(南山)을 등지고 있는 산촌 마을이다. 이 화악산빨치산들이 창녕 화왕산에서 운문산으로 내왕하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해방 정국과 6·25전쟁 기간 중 빨치산 출몰이 잦은 지역 중 한 곳이었다.

[경과]

1949년 7월 초순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 사리의 경비단장 박재환은 순찰 도중 맞닥뜨린 빨치산 2명과 격투를 벌였는데, 빨치산이 경비단장에게 부상을 입고 도주했다. 그로부터 3∼4일 후에 빨치산들은 이를 보복하려고 다시 출현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 후 1950년 3월 9일 밤 9시경 국군으로 변복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등장하여 경비원을 전원 소집한 뒤, 경비단장 집으로 집결시켰다. 빨치산들은 단장과 경비원들을 방안에 앉혀 놓고서 전원에게 총상을 가한 다음, 집과 시체에 방화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후 마을 떠났다.

[결과]

화악산 사건 으로 희생된 사람들은 피살자 9명, 중상자 2명, 경상자 7명 총 18명이었다. 빨치산들은 그 길로 옥산리를 지나면서 경비원 1명을 더 살해한 후 도주하였다. 사건을 계기로 빨치산에 대한 지역민들의 경계심이 한층 공고해졌다.

6·25 전쟁 이 발발하자 1950년 11월 하순경 국군 제 875부대 1개 소대가 마을에 주둔하게 되었고, 12월에 민가를 침입한 빨치산 1명을 사살했다. 그 후부터는 이 마을에 빨치산이 나타나지 않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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