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4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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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十一事件 |
이칭/별칭 | 10월 폭동 사건,10·1 폭동,영남 폭동,10·1 소요,46년 가을 폭동,10월 폭동,추수 폭동,10월 항쟁,10월 인민 항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946년 남로당 계열을 비롯한 좌익 계열이 선동하여 대구에서 시작하여 청도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된 시위 사건.
[개설]
10·1 사건 은 대구 노동 평의회 측과 경찰의 충돌이 폭력 사태로 발전되면서 격화된 사건이다. 경찰은 대구 노동 평의회가 불법적인 단체라고 규정하고 대구 노동 평의회 투쟁 위원회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파업 조종자의 색출과 파업의 금지에 나섰다. 이로 인해 경찰과의 충돌이 벌어졌으며 이 사태가 대구의 10·1 사건을 유발한 직접적 원인과 동기가 되었다.
10·1 사건 은 당시 미군정은 ‘소요’, 우익은 ‘폭동’, 좌익은 ‘항쟁’으로 규정한 데서 볼 수 있듯이 그 정치적 입장에 따라 시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명칭 역시 10·1 사건, 10월 폭동 사건, 10·1 폭동, 영남 폭동, 10·1 소요, 46년 가을 폭동, 10월 폭동, 추수 폭동, 10월 항쟁, 10월 인민 항쟁 등 다양하게 불린다.
[역사적 배경]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미군정의 좌익 진영 배제, 박헌영의 신전술 등은 미군정과 좌익 진영 간의 갈등과 대립을 고조시켰다. 박헌영의 신전술 일환으로 전개된 1946년 9월 총파업은 대구에서도 철도 파업으로 이어졌다. 또한 10월 1일 대구역 앞에서의 시위 때 시위자 1명이 경찰이 발포한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10·1 사건의 직접적인 발생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근원적인 배경은 해방 이후 국가 건설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개혁 요구의 좌절과 대구·경북 지역의 식량 부족 문제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과 분노에 있었다. 이러한 불만과 분노가 이 사건을 계기로 분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경과]
1946년 10월 2일 대구에서는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지만 오히려 경상북도 및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미군 기록에 의하면 경상북도 청도군에서는 청도군 민주 청년 동맹 위원장이 1946년 10월 1일에 대구에 갔다가 시위 현장을 접하고 돌아와 그날 민주 청년 동맹 회원들 80여 명과 함께 청도 경찰서 앞에 집결해 무기를 내놓으라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큰 무력 충돌 없이 40명을 체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청도 장날에 수백 명의 군중이 청도군청에 몰려와 식량을 배급해 줄 것을 요구했고, 군청에서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자 군중들의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때 지역 인사들이 중재에 나서 군중들을 진정시키고, 군청 직원들과 수의(收議) 뒤 약간의 식량을 배급하고 후일을 약속해 큰 소동 없이 해산하였다.
그러나 청도군 화양읍에서는 동상(東上)·서상(西上)·동천(東川)·교촌(校村)·합천(合川)·눌리(訥里) 등에서는 좌익 계열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고 밤에는 횃불 시위를 하는 등 소란을 피웠다.
한편 해방 이후 청도 지역 사회 문화적 중심지 기능을 하며 유격대들이 자주 출몰하던 이서면에서는 10월 6일 좌익 계열이 동원되어 이서면사무소와 이서 지서를 접수하였다. 그들은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기로 결정하고, 수백 명이 만세와 시위를 부르면서 학산(鶴山)에서 양원(陽院) 지서까지 행진하며 세력을 과시하였다.
미군정은 청도군을 계엄령 선포 지역에 포함하였고, 이후 경찰력이 증강·투입되어 치안과 질서를 회복시켰다.
[결과]
1946년 10월 20일에 사건 대책 위원회가 조사·발표한 청도군의 피해 상황을 살펴보면 사망자 1명[일반인], 부상자 1명[관리], 경찰서 건물 일부 파괴 1건으로 피해는 비교적 경미한 수준이었다. 미군정 자료인 「24군 사령부 감찰 참모실 대구 사태 보고서」에 의하면 청도 경찰서장과 재판소장이 친공 분자(親共分子)였기 때문에 사태가 심각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0·1 사건 은 해방 정국의 전개에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 중 하나로, 미군정과 좌익 진영은 더욱 갈등과 대립이 심해져 민족적·계급적 모순을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