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794 |
---|---|
한자 | 河東-千年古刹-雙磎寺 |
영어의미역 | Thousand-Year Old Ssanggyesa Templ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곽승훈 |
[개설]
쌍계사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의 절이다. 840년 진감(眞鑑)이 중창한 선종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육조대사의 머리를 취해 온 삼법화상]
현재 남아 있는 쌍계사와 관련한 자료 중 신빙할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진감국사대공령탑비(眞鑑國師大空靈塔碑)’의 내용이다. 이 비문에 진감국사가 삼법(三法)이 머물던 터에 절과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세웠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토대로 훗날 많은 이야기가 더해져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禪宗六祖慧能大師頂相東來緣起)」가 성립되었다. 「선종육조혜능대사정상동래연기」에 의하면, 722년(성덕왕 21) 삼법이 당나라에 가서 육조대사[혜능(慧能)]의 머리를 취해 귀국하여 영묘사(靈妙寺)에 머물렀다. 이때 삼법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강주(康州) 땅 지리산 기슭에 눈이 쌓였으나 칡꽃이 핀 곳을 찾으라고 하였다. 다음날 이 뜻을 좇아 지리산으로 가 보니 추운 겨울 날씨에도 칡꽃이 만발한 곳이 있었다. 삼법은 이곳에 돌을 다듬어 함을 만들고 육조대사의 정상을 모셨다. 아울러 절을 짓고 날마다 선정(禪定)을 닦다가 17년 뒤인 739년(효성왕 3) 7월 12일 출가한 운암사(雲岩寺)로 돌아가 입멸(入滅)하였다.
[삼법이 머물던 터에 지은 쌍계사]
삼법이 죽은 후 100여 년쯤 지난 830년(흥덕왕 5)에 진감(眞鑑) 혜소(慧昭)[774~850]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잠시 상주 장백사(長栢寺)에서 거주하다 삼법이 머물던 화개곡(花開谷) 터에 절을 지었다.
혜소는 774년(혜공왕 10) 전라북도 전주의 금마(金馬)[현 익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였다. 804년(애장왕 5)에 당나라로 가던 세공사(歲貢使)의 노꾼이 되어 배를 얻어 탔다. 당에 이르러 창주(滄州)로 가서 신감(神鑒)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810년(헌덕왕 2) 숭산(崇山) 소림사(小林寺)의 유리계단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후 혜소보다 먼저 당에 도착한 도의(道義)와 함께 중국의 이곳저곳을 두루 돌아다녔다. 도의가 귀국한 뒤 혜소는 종남산에 들어가 3년간 지관(止觀)을 수행하였다. 다시 3년 동안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오가는 사람에게 보시하였다.
830년(흥덕왕 5) 혜소가 귀국하자 흥덕왕이 기뻐하며 우대하였다. 이후 혜소는 상주 장백사에서 주석하다 불법을 펴기 좋은 곳을 찾던 중 지리산에 이르렀다. 지리산에 머물며 선을 전파하던 어느 날 호랑이가 길을 인도하므로 쫓아가 보니 삼법이 머물렀던 화개곡의 절터에서 멈추어 섰다. 이에 혜소는 이 터에 절을 짓고 대나무 통으로 물을 끌어와 집 둘레 사방에 물을 대어 옥천사라 하였다. 838년(민애왕 1) 왕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850년(문성왕 12) 혜소는 나이 76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다. 886년(헌강왕 12) 헌강왕이 시호를 진감이라 하고, 탑호를 ‘대공령탑’이라 하였다. 당시 혜소가 머물던 이웃 산의 절도 옥천사로 불려 여러 사람이 혼돈하였다. 정강왕이 절의 위치를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 데 있으므로 절의 이름을 쌍계사라 부르도록 했다.
[불에 탄 천 년 고찰을 중건하다]
쌍계사에 관한 고려 시대의 문헌 자료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 중종 35년인 1540년에 중섬(仲暹)이 쌍계사가 오래되어 낙후되었으므로 조정에 나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특히 대공령탑비가 지극한 보배임을 알리고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간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팔영루(八詠樓) 5칸의 지붕을 다시 이고 대공령탑비의 앞뒤에 석대를 쌓았으며, 연못을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였다. 3년 뒤인 1543년(중종 38)에 운수승(雲水僧) 혜수(惠修)가 중창할 뜻을 세우고 시주를 모집하였다. 성과가 좋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대웅전을 세울 수 있었고, 차례로 금당과 방장을 지어 낙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쌍계사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과 소요태능(逍遙太能)[1562~1649] 등이 협소한 옛 절터에서 벗어나 지금의 자리에 별도로 사찰을 중창하였다. 이때 응진당·명부전·관음전·화엄전·팔영루와 여러 요사채를 건립하고 뜰 가운데에 대공령탑비를 두었다.
3년 후인 1639년(인조 17)에 목조삼세불좌상 및 사보살입상을 조성하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인계(印戒), 1695년(숙종 21)에 백암성총(栢庵性聰)[1631~1700], 1735년(영조 11)에 법훈(法訓), 1850년(철종 1)에 쌍운(雙雲)이 중수하였다. 1864년(고종 1)에 담월(潭月)과 용담(龍潭)이 육조 정상 탑전에 칠층보탑을 세웠다. 1898년(고종 35) 명부전이 붕괴되어 같은 해 7월에 재건하였으며, 이후에도 전각이나 불상 등의 개채(改彩)가 계속 이루어졌다. 1975년을 전후하여 고산(杲山)에 의해 대대적으로 전각의 중수가 이루어져 쌍계사는 지금과 같은 사찰의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쌍계사의 보물들]
현재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된 쌍계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로 국사암·칠불암·불일암·도원암 등의 암자와 60여 개의 말사를 거느리고 있다. 서쪽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지형에 맞춰 크고 작은 24동의 건물과 10여 동의 부속 건물들이 있는데, 크게 2개의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동서의 긴 축선을 중심으로 펼쳐진 대웅전 영역이다. 이 영역에는 대웅전뿐만 아니라 일주문·금강문·천왕문·팔영루·나한전·적묵당·명부전 등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축선에 직교하여 남북축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된 금당 영역이다. 이 영역에는 금당과 팔상전·영주각·방장실·봉래전·청학루·영모전 등의 전각이 있다. 두 영역에는 22점의 지방 지정 문화재뿐만 아니라 국가 지정 문화재인 국보 1점과 보물 6점이 있다.
1. 국보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쌍계사 진감국사대공탑비는 887년(진성여왕 1)에 건립되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짓고 아울러 전서의 제액과 비문의 글씨도 썼다. 비 높이는 3.63m, 비신 높이는 2.13m, 너비는 1.035m, 두께는 22.5㎝이며,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신은 흑대리석이다. 이 탑비는 최치원이 글을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비문에는 혜소의 입당 구법 과정과 귀국 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최치원의 유·불·도 삼교 일치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쌍계사의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도 기록하고 있다.
2. 보물
쌍계사의 보물로는 부도 등 6점이 있다.
1) 하동 쌍계사 승탑[보물 제380호]
쌍계사 북쪽 탑봉우리 능선에 위치한 혜소의 사리탑이다. 봉우리의 능선을 7m 방형으로 평평하게 닦아 2단의 석단을 만들어 중앙에 2.05m의 높이로 건립하였다. 화강암을 사용하여 상·중·하대로 형성된 기단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를 올려놓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승탑이다.
2) 하동 쌍계사 대웅전[보물 제500호]
조선 후기의 불전으로 절의 중심 법당이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이고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3단의 자연 석축으로 형성한 단축(段築) 위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세워져 있으며, 내외 3출목 7포작인 다포계 구조 형식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재료들의 형태가 비교적 우아한 곡선과 오래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둥이 높아 건물의 규모가 크게 느껴진다.
3) 「쌍계사 팔상전 영산회상도(雙磎寺八相殿靈山會相圖)」[보물 제925호]
1688년(숙종 14)에 그려진 불화로 크기는 길이 402㎝, 폭 291.5㎝이다.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심으로 하고, 그 아래에 협시보살인 문수·보현이 모시고 서 있다. 그 옆에 계단식으로 사천왕, 4보살, 6제자, 4여래, 6위의 용왕과 대신 등이 있으며, 그 위쪽으로 광배 화염을 따라 20위의 화불들이 배치되어 있다. 화기에 응혜(應慧)·천신(天信)·일행(一行)·처징(處澄) 등 참여한 승려의 이름이 보인다.
4) 「쌍계사 대웅전 삼세불탱(雙磎寺大雄殿三世佛幀)」[보물 제1364호]
중앙의 석가모니불도를 중심으로 왼쪽에 약사불도, 오른쪽에 아미타불도를 배치한 삼세불 탱화이다. 석가모니불도는 화면 상단 중앙에 본존불을 그리고, 좌우 대칭으로 8대 보살과 제석·범천, 2위의 타방불, 10대 제자, 용왕·용녀와 6금강, 2위의 사천왕을 배치하였다. 약사불도는 아미타인과 같은 손 모양을 하고 왼손에 약합을 든 약사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대칭이 되게 6대 보살과 2위의 사천왕, 12신중을 그려 놓았다. 아미타불도는 주불을 그리고, 그 주위에 빙 둘러 8대 보살과 2위의 사천왕, 2위의 타방불, 10대 제자를 배치시켜 놓았다.
5) 「쌍계사 팔상전 팔상탱(雙磎寺八相殿八相幀)」[보물 제1365호]
1728년(영조 4)에 일선·후경·명정·최우·원민·처영·신영·영호 등 8명의 승려가 만든 것으로 세로는 179.5㎝이고, 가로는 164㎝이다. 석가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팔상탱이다. 이 팔상탱은 모두 8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폭의 장면은 건물과 구름·나무·산을 이용하여 구분을 짓고, 각 장면마다 이에 따른 내용을 적어 놓고 있어 그림을 이해하기가 쉽다.
6)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河東雙磎寺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四菩薩立像)[보물 제1378호]
1639년(인조 17)에 청헌(淸憲) 등 11명의 화승들이 조성하였다. 나무로 만든 삼세불좌상 중 아미타불을 제외한 석가모니불과 약사불이다. 중앙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은 본존불로 삼불상 중 가장 크고 건장한 신체에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정면을 향하여 본존불의 오른쪽에 모셔져 있는 것이 약사불이다. 사보살입상은 약사불과 아미타불 좌우에 서 있는 네 구의 보살입상으로 일광·월광보살상과 관음·세지보살상으로 추측된다.
7) 그밖에도 2021년 2월 17일 새롭게 보물로 지정된 선원제전집도서 목판(禪源諸詮集都序 木板)[보물 제2111호], 원돈성불론ㆍ간화결의론 합각 목판(圓頓成佛論ㆍ看話決疑論 合刻 木板)[보물 제2112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목판(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木板)[보물 제2113호] 등이 있다.
3. 지방 문화재
지방 지정 문화재로는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8호 쌍계사 석등, 제86호 쌍계사 일주문, 제87호 쌍계사 팔상전, 제123호 쌍계사 명부전, 제124호 쌍계사 나한전, 제125호 육조 정상 탑전(六祖頂相塔殿), 제126호 쌍계사 천왕문, 제127호 쌍계사 금강문, 제185호 쌍계사 소장 불경 책판(雙磎寺所藏佛經冊板), 제384호 「쌍계사 삼장보살탱」, 제385호 「쌍계사 팔상전 신중탱」, 제386호 「쌍계사 국사암 아미타후불탱」, 제413호 하동 쌍계사 사천왕상, 제479호 하동 쌍계사 동종이 있다. 또한 경상남도 기념물 제21호 쌍계사와 제61호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5호 청학루, 제46호 쌍계사 적묵당, 제48호 쌍계사 마애불, 제74호 팔영루, 제153호 쌍계사 설선당이 있다. 이들 중 육조 정상 탑전과 불경 책판, 차나무 시배지, 팔영루는 다른 사찰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문화재들이다.
1) 육조 정상 탑전
육조 정상 탑전은 중국 선종의 제6대인 혜능의 정상을 모신 건물이다. 육조 정상은 신라 성덕왕 때 삼법이 당에서 가져와 석함에 모셨다고 전하며, 민애왕 때 혜소가 석함을 보호하기 위해 건물을 세워 육조영당이라 불렀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 안에는 칠층석탑이 있는데, 1864년(고종 1)에 목압사의 석탑을 용담이 옮겨 세운 것이라 전한다.
2) 쌍계사 소장 불경 책판
불경 책판은 쌍계사에 33종 1743판이 소장되어 있다. 이 수는 해인사 다음으로 많다. 목판에는 대승경전인 『법화경(法華經)』·『원각경(圓覺經)』·『아미타경(阿彌陀經)』 등과 고승의 문집인 『백우수필(百愚隨筆)』 등, 의식 관련 책인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청문(請文)』 등이 있다. 또한 우리나라 선승(禪僧)의 저술인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등과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선서(禪書)인 『육조법보단경(六祖法寶壇經)』·『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몽산법어(蒙山法語)』 등이 있다.
이 중 선종 관련 문헌들은 거의 능인암에서 판각하여 옮겨 왔고, 나머지는 쌍계사·국사암·병풍암·칠불사·영원암 등에서 판각하였다. 능인암판은 1603~1604년에 대부분 간행되었다. 국사암판은 1903년에, 나머지는 17~18세기에 간행한 것이다. 이들 경판은 17~18세기에 쌍계사의 사격(寺格)이 높았던 것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라 할 수 있다.
3)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
차나무 시배지는 828년(흥덕왕 3) 대렴(大廉)이 당에 사신으로 갔다가 신라로 돌아오면서 가져온 차나무의 종자를 왕의 명으로 처음 심었던 곳이다. 이후 831년(흥덕왕 6)에 혜소가 차를 번식시켜 보급이 본격화되었다. 지금도 화개장터 입구에서 쌍계사를 지나 신흥에 이르는 양쪽 산기슭에는 차밭이 12㎞에 걸쳐 0.29㎢가 조성되어 연간 2.5톤의 차가 생산된다.
4) 팔영루
팔영루는 840년(문성왕 2) 혜소가 세웠다고 전하며, 1636년(인조 14)에 벽암각성, 1978년에 고산이 각각 중창하였다. 건물은 앞면 5칸과 옆면 3칸의 목조와가 맞배집으로 2층을 이루며 총 건평은 350.41㎡이다. 이곳은 혜소가 당에 가서 불교 음악인 범패를 배우고 돌아와 우리 실정에 맞게 바꾸어 가르친 장소이다. 혜소가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8음률을 이용하여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고 불린다.
[참선과 차, 범패의 근본 도량]
쌍계사는 대외적으로 선(禪)·다(茶)·음(音)의 근본 도량임을 표방하면서 여러 사업과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먼저 참선과 차·범패를 체험할 수 있게 한 템플 스테이(Temple stay)는 ‘본마음 참 나’라는 주제를 내걸고, 이를 이루기 위해 계곡 참선과 소리 명상, 달빛 명상, 영화로 떠나는 불교 여행, 차 문화 체험을 하게 한다. 어린이들만의 템플 스테이도 실시하여 사찰과 불교에 대해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고, 다양한 불교 활동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또한 템플 스테이에 외국인도 참여할 수 있게 하여 우리의 우수한 불교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있다.
아울러 쌍계사는 진감선사와 초의선사의 다맥을 전수하는 한편으로 산사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행사는 1996년부터 하동군에서 해마다 5월에 열리는 차 문화 축제인 ‘하동 야생차 문화 축제’와 함께 열린다. 불가 전통 헌다와 육조·진감·초의선사 108 헌다례, 다맥 전수식을 거행하고 범패와 국악을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