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05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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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雙磎石門 |
영어의미역 | Stone Gate in Ssanggyesa Temp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208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박용국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에 있는 최치원의 글씨.
[개설]
쌍계사 석문(雙磎寺石門)은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857~?]의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말한다. 쌍계사(雙磎寺)는 723년(성덕왕 23) 의상(義湘)[625~702]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절 이름은 절 문 앞으로 흐르는 쌍계에서 비롯하였으며, 이로부터 쌍계사 석문이 연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건립 경위]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이 최치원에게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고 전한다.
[위치]
쌍계사 석문은 쌍계사의 입구에 해당한다. 현재 쌍계사 석문에서 쌍계사 일주문(雙磎寺一柱門)까지의 거리는 대략 400m 정도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1487년(성종 18) 10월 9일 쌍계사에 들렀는데, 쌍계사 석문 안쪽으로 1~2리쯤에 쌍계사가 있다고 하였다.
[형태]
정면에서 바라볼 때 오른편의 타원형 자연 바위에 ‘쌍계’ 2자가 음각되어 있으며, 왼편의 마름모꼴 자연 바위에 ‘석문’ 2자가 음각되어 있다. 두 자연 바위는 5m쯤 떨어져 수문장처럼 서 있다. 옛날에는 법계(法界)와 속계(俗界)를 경계 지었을 것이다.
‘쌍계석문’ 4자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보면 고졸(古拙)한 맛이 난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은 최치원의 필적으로 알려진 하동군 화개의 ‘쌍계석문’과 단성의 ‘광제암문(廣濟嵒門)’을 보고 난 후 전자를 유치한 수준의 것으로 본 데 비하여 후자를 잘 쓴 글씨로 보았다. ‘광제암문’은 필세(筆勢)가 경고(硬古)하여 쌍계사의 ‘쌍계석문’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하였다.
[의의와 평가]
최치원의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 4자는 조선 시대 유자(儒者)나 승려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였다. 추강 남효온은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에서 “[1487년 10월 9일] 진주의 화개동에 이르렀다. 웅연 벼랑길을 벗어나 쌍계천 서쪽 가를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의 인가가 그림 병풍처럼 환했다. 진주와 구례 경계의 소후(小堠)에서 또 20여 리를 걸어갔다. 서쪽에서 동쪽을 건너자 문처럼 생긴 양쪽의 바위가 있었다. ‘쌍계석문’이라는 4개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창후 최치원이 손수 적은 것이다. 석문 안 1, 2리쯤에 쌍계사가 있었다”고 하여 ‘쌍계석문’을 최치원의 필적으로 보았다.
조선 중기 고승인 소요(逍遙) 태능(太能)[1562~1649]은 1647년(인조 25) 9월 쌍계석문을 보고 나서 「제쌍계사최고운석문필적(題雙溪寺崔孤雲石門筆迹)」이라는 시를 한 수 읊었는데, 풀이하면 「쌍계사 최고운의 석문 필적에 제하다」이다. 그 내용은 “두류산과 방장산은 참으로 선계로다[頭流方丈眞仙界]/ 기쁘게 읊으면서 석문에 새겼으니[鼓翼淸吟付石門]/ 석문의 필적은 인간의 보배가 되었는데[石門筆迹人間寶]/ 신선이 노닌다며 흰 구름이 가로막네[遊戱金壇銷白雲]”이다. 이렇듯 최치원의 친필이라고 전하는 ‘쌍계석문’ 4자는 후대인에게 시상(詩想)의 소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