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4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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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秋鴻順 |
영어음역 | Chu Hongsun |
이칭/별칭 | 대순(大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양판석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3월 1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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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6일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0월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6월 11일 |
추모 시기/일시 | 1997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232 |
활동지 |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일신단 회원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함흥(咸興).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군에 소속되어 장수로 활약한 추수경(秋水鏡)[1530~1600]의 9세손이다. 부인은 평산 신씨(平山申氏)이며, 그 사이에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을 두어 양자를 들였다.
[활동 사항]
추홍순(秋鴻順)[1894~1959]은 1894년 3월 12일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 232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9일 매제(妹弟)인 정재운(鄭在雲)[1895~1950]과 하동군 진교면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4월 3일에는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진교면까지 만세 시위를 선두에서 지휘하였다. 이날 일부는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에서 노량을 거쳐 남해까지 행진하며 만세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무렵 하동에서는 민족 대표 33명을 본받아 고전면과 금남면에서 33명으로 구성된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하였는데, 추홍순은 여기에 가입하여 금남면 대표로 활동하였다. ‘일신단’은 한마음 한뜻으로 죽을 때까지 한 몸처럼 일제에 대항하겠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며, 주동자를 알 수 없게 가운데 둥근 원을 중심으로 각각의 성명을 기재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추홍순은 4월 6일 하동군 고전면 주교[배다리] 장터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 주며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일본 경찰과 헌병, 조선인 경찰관 박도준(朴道俊) 등이 시위를 저지하였으나 일신단원과 2,000여 명의 군중에게 제압당하고 함께 만세를 외쳐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추홍순은 시위가 끝나고 사람들이 철수할 때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로 달려가 숨겨 둔 일신단의 연명 기록서를 태웠다.
시위대가 해산한 후 일본군 수비대는 주동자 색출에 동분서주하였다. 일본군 수비대는 지소마을 건너편 양경산 언덕에 진지를 갖추더니, 다음 날 아침 헌병 20여 명과 경찰 10여 명이 마을 안으로 총을 쏘며 들어오려 하였다. 박영묵(朴永默)·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 등이 “어제 일은 우리가 주동한 것이며 나머지는 상인들이다”라고 나서서 체포되었다.
추홍순은 4월 21일 밤주재소에 끌려가서 배후를 밝히라는 추궁을 당하였으며, 5월 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5월 20일 징역 5개월 형이 선고되어 10월 말까지 6개월 19일 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추홍순은 1921년부터 이웃의 소년들을 대상으로 글을 가르치며 애국정신을 고취시켰으며, 1959년 6월 11일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7년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묘소는 하동군 하동읍 비파리 공설운동장 인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