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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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在基 |
영어음역 | Jeong Jaeg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962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영숙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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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몰년 시기/일시 | 1974년 1월 27일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출생지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962 |
비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 |
비 |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배다리장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4월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의 배다리장터에서 열린 만세 운동에는 인근 양보·진교·금남 주민 1천여 명이 동참하여 하동군 내 어느 지역보다 규모가 컸다. 이들이 만세 운동을 진행했던 배다리장터에는 현재 장은 서지 않고 그 터만 남아 있으며, 만세 운동을 기념해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 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배다리장터는 ‘배더리장터’라고도 하는데 이는 ‘주교(舟橋)’라는 지명을 한글로 풀이한 것이다. 이곳 주민들은 이곳이 하동군의 갈사만이 매립되기 전까지 배가 장터까지 들어왔다는 뜻에서 배다리[배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활동 사항]
정재기(鄭在基)는 1894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6일 고전면에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박영묵(朴永默)의 지도 아래 민족 대표 33인을 본뜬 33인의 일신단(一身團)이 조직되어 배다리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하게 된다.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출신인 정재기는 이때 일신단의 일원으로 만세 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정윤용(鄭潤鎔) 등이 마을의 청장년층을 모았고, 일신단원인 추홍순(秋鴻順)은 금남면 궁항리와 덕천리까지 진출하여 청장년들을 설득하고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때 정재기는 하동읍으로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돌아오던 중 하동읍내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러 다니는 청년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면서도 정재기는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끝까지 일신단 조직을 발설하지 않아 고전면의 만세 운동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이후 정재기는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2일 출옥하였다.
이후 정재기는 1938년 흉년으로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자신의 곡식 창고를 열어 주민들을 구휼하였다. 은혜를 입은 주민들이 정재기를 적선지가(積善之家)로 추앙하고, 뜻을 모아 마을 어귀에 정재기 불망비(鄭在淇不忘碑)를세웠다. 정재기는 1974년 1월 27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8년 8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1982년 3월 1일 일신단으로 활동했던 이들의 의로운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지소마을에 삼일 독립운동 의거기념비가 세워졌고, 이들이 만세 운동을 벌였던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 배다리장터에는 1985년 12월 30일 하동군 고전면민 만세 운동 기념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