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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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李氏 |
영어의미역 | Jeonju Yi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집필자 | 권만용 |
세거지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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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
입향시기/연도 | 조선 전기 |
성씨시조 | 이한 |
입향시조 | 이원익 |
[정의]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원익을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연원]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은 선원선계(璿源先系)에 따르면, 전주에 토착해 온 명문 태생으로 신라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을 지낸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였고 문성왕 때 사공을 지냈다. 이한의 선대가 언제부터 전주에 세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한 이후 전주에 세거하여 후손들이 전주를 관향으로 삼았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李成桂)의 6대조 이린(李隣)과 이린의 형 이의방(李義方) 등은 고려 중앙 정부에 진출하여 관직에 있었고, 이성계의 직계 선조는 동북 지역으로 이주하여 여진족이 사는 지역에서 살기도 하였다. 이성계는 환조 이자춘의 셋째 아들이며 시조 이한의 22세손으로 조선을 개국하였고, 이후 조선 왕조는 500여 년 동안 27명의 임금이 나오면서 크게 번성하여 왕자나 대군(大君), 군(君)을 파조로 하는 파계를 이루었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이안사(李安社) 선계에서 갈라진 파와 그 이후 갈라진 파를 합해 모두 123파이다.
이성계의 아들 진안대군 이방우(李芳雨)는 태조로부터 ‘전주이씨 가문의 백이숙제(伯夷叔齊)’라 불린 인물로 고려 말 공양왕을 옹립했을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정변을 설명하였으나 조선 개국 후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에 은거하였다.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李치(示+多))의 아들 이정은(李貞恩)은 수천부정(秀川副正)을 거쳐 종친부도정을 지냈고, 세조의 조카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은 문무를 겸비한 명신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효령대군 6대손 이직언(李直彦)은 선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혔다. 익녕군 이치의 후손인 이억재(李億載)는 종직으로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내고 함천도정(咸川都正)에 올라 1582년(선조 15) 함천군에 봉해졌으며 보조공신에 추증되었다. 이억재의 아들 이원보(李元輔)는 생원시에 급제하여 통진군수(通津郡守)와 흡곡현령(翕谷縣令) 등을 지냈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이원보의 동생인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은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오른 이후 안주목사·사헌부대사헌·평안도도순찰사·우의정 등을 지냈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오르고 완평부원군에 봉해졌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세자를 호위했다. 이후 훈련도감도제조를 역임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광명 지역으로 낙향했다. 청렴한 생활로 청백리에 뽑혔고, 사후에 인조 묘정, 여주 기천서원, 광명 충현서원, 안주 청천사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리집(梧里集)』, 『속오리집(續梧里集)』, 『오리일기(梧里日記)』 등이 있다.
이순신(李純信)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큰 공을 세웠고 노량해전에 참가하였다가 이순신이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3등에 올랐다. 이명(李溟)은 인조 때 병자호란 뒤 피폐해진 나라의 재정을 맡아 국고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 우리나라 재정 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꼽혔던 이서구(李書九)는 순조 대에 우의정을 역임했으며 명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지연(李止淵)은 헌종 대에 우의정으로 있으면서 『순종실록(純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헌구(李憲球)는 철종 대에 좌의정을 지내고 궤장(机杖)을 하사받았으며,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은 고종의 아버지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일제강점기 이종원(李宗遠)·이정석(李貞石) 부자는 독립운동가로서 가문을 크게 빛냈다. 1919년 3월 27일 밤 이정석이 만세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노온사리 주재소에 강제로 연행되자, 이종원은 이 사실을 최호천(崔浩天)·윤의병(尹義炳)에게 알리고 다음 날 구출할 것을 의논한 뒤 주민 200여 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석방을 외치면서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영래(李永來)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을 보고 광명으로 돌아와 3월 27일 만세 운동을 하기로 협의하여, 그날 저녁 마을 서쪽 언덕 위에서 주민 다섯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쳐 이 지역의 만세 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승만(李承晩)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이원익의 18세손 이승규(李升圭)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입향경위]
태종의 손자인 수천군(秀泉君)의 묘를 광명시 소하동에 조성하면서 익녕군파 후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였고, 이원익이 광명시로 낙향하면서 후손들이 터를 잡았다.
[현황]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11월 당시 광명시에 거주한 전주이씨는 총 4,158가구에 1만 6088명이었다. 광명시에서는 오리 이원익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5월 오리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관련유적]
광명시 소하동에 경기도 기념물 제85호인 이원익 선생 묘 및 신도비, 소하동 충현박물관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0호인 오리 이원익 종택 및 관감당,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1호인 오리 이원익 영우, 보물 제1435호인 「이원익 초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