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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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純信 |
영어음역 | Yi Sunsin |
이칭/별칭 | 입부(立夫),완산군(完山君),완천군(完川君),완천부원군,무의(武毅)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동인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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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
성별 | 남 |
생년 | 1554년 |
몰년 | 1611년 |
본관 | 전주 |
대표관직 | 경상우도수군절도사 |
[정의]
조선 전기 광명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입부(立夫). 태종의 첫 번째 왕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이귀달(李貴達)이며, 아버지는 이진(李眞)이다. 어머니는 복주김씨(福州金氏)로 외할아버지는 진사(進士) 김구수(金龜壽)이다. 부인은 경상도병마우후(慶尙道兵馬虞候) 윤천수(尹天壽)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순신(李純信)[1554~1611]은 어릴 때부터 유업(儒業)보다 기사(騎射)에 흥미를 느껴 25세 때인 1578년(선조 11) 무과알성시(武科謁聖試)에서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왕이 친전하는 활쏘기 경연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북방에 나가는 것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이후 두 차례 선전관청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비변사낭청으로 뽑혀 강진현감으로 3년을 지내고, 1586년(선조 19)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판관(判官)을 지냈다. 처음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김성일(金誠一)이 그의 능력을 알고 적극 추천한 것이다.
부친상을 마치고 1588년(선조 21)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북방을 방위하였다. 이때 사신 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물품을 요구하였으나, 노자만 마련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이 일로 파직되었다가 여진족이 운총(雲寵)에 자주 침입하자 1589년(선조 22) 혜산진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로 다시 임명되었다. 여진족이 또다시 침입하였으나 당도하기 전에 모두 달아났는데, 이 때문에 문책을 받고 원희(元熹)와 이억기(李億祺) 등과 파직되었으나 선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다른 곳으로 임용되었다.
1591년(선조 24) 일본 통신사 일행의 보고에 따라 남해안 방어책이 강화되면서 방답진첨절제사가 되었다. 이해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성지(城池) 수리와 무기 보충에 노력하고 전선 제작에도 자문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옥포와 고성 해전에 참전하여 세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그 뒤로 전부장(前部將)으로서 선봉이 되어 당항포(唐項浦) 싸움에서 왜선(倭船)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여 한산도(閑山島) 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부산포 해전 이후 1593년(선조 26) 해전의 소강상태가 진행될 즈음 충무공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이순신만 싸운 공은 있어도 싸운 상은 없다고 주장하여 절충장군에 제수되었다.
1594년(선조 27) 충청수사가 되었으나 법규를 어긴 대관(大官)에 대하여 군율(軍律)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였다는 무고로 구금 조사를 받았다. 무죄로 밝혀졌으나 압록강 변 고령진(高嶺鎭)의 첨절제사로 좌천되었다. 1년 만에 비변사에서 추천하여 유도방위대장(留都防衛大將)이 되어 서호에서 한양을 방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에 바로 제수되었고,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한양 방위가 중요하다고 하여 그대로 머물게 되었다.
정유재란 때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과 고성에서 대패하고 충무공 이순신이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자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왜란 중에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의 관직을 거쳐 충청도수군절도사로서 장문포(長門浦) 해전에 참전하였고,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왜교성(倭橋城) 전투에 참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598년(선조 31) 경상우도수군절도사로서 노량(露梁) 해전에 참전하였을 때, 이순신이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전군을 지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듬해 포도대장(捕盜大將)이 되었으나 무고한 사람을 장살(杖殺)하였다는 죄로 한때 파직되었다. 1600년(선조 33)에 복직되어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황해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으나 재물을 탐냈다고 하여 파직되었다. 이해 다시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갔으나 또 파직되었다. 1602년(선조 35)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재임하다가 파직당하는 등 여러 차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면직과 복직을 거듭하였다.
1604년(선조 37) 벼슬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 활약한 공으로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杖義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며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급되었다. 1606년(선조 39) 다시 수원부사를 거쳤고, 이듬해 완천군(完川君)에 개봉(改封)되었다. 임해군 옥사에 연루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9월 전라도병마절도사로 근무하다가 이듬해 9월 별세하니 향년 58세였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일직동[옛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허목(許穆)이 명(銘)을 지은 묘갈(墓碣)이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망실(忘失)되어 전하지 않는다. 양녕대군의 지덕사(至德祠)가 위치한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도 조선시대에는 금천이었고, 그의 후손인 이순신의 묘소도 금천이었다는 점은 양녕대군 후손의 거주지를 이해하는 데에 시사적이다.
[상훈과 추모]
인조 때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고, 효종 대에는 장남인 이탁의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됨에 따라 우의정과 완천부원군(完川府院君)으로 추증되었다. 이후 숙종 조에 이르러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적을 꺾고 침략을 막아낸 것’을 무(武)라 하고 ‘용기를 다하여 적을 죽인 것’을 의(毅)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