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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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의미역 |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경기도 광명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정유재란을 포함]까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한 일본과의 전쟁이다. 16세기 후반 일본의 전국시대의 혼란을 마감시키고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던 지방 다이묘[大名]들의 불만을 외부로 분출시키고, 동아시아의 교역권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해외 침공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1592년 4월 조선의 부산포에 군사를 상륙시켜 조선 침공을 단행함으로써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을 주장으로 하여 조선 땅에 상륙한 일본군은 오랜 전국시대의 경험을 통하여 강화된 전력을 바탕으로 전세를 압도적으로 주도하면서 북상했다.
당시 조선은 건국 후 200여 년간의 비교적 평화적인 대외 정세와 내부의 정치 갈등 등으로 적절한 군사적 대응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예를 들면 이이(李珥)[1536~1584]가 남왜북호(南倭北胡)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며 국방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나 오히려 배척당하였다. 조선은 개전 초기 패전을 거듭하였고, 결국 당시 임금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양[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해전에서 이순신의 활약이 거듭되면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전국 각지에서 유생, 승려, 일반 농민 등으로 구성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맞섰다.
또한 전쟁 발발 이듬해 1월에 명군(明軍)이 참전하여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을 공격함으로써 일본군은 퇴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 측에서 먼저 강화(講和)를 제의하여 명과 일본 간에 강화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국 강화회의는 결렬되고 1597년(선조 30) 도요토미는 재차 공격을 지시하여 다시 전면전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남하하게 되었고, 1598년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조선 땅에서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7년간에 걸친 전쟁이 종료되었다.
[경과]
임진왜란의 개전 초기 빠른 속도로 북상하는 일본군으로 인해 결국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후 수도 한성은 1592년(선조 25) 5월 2일 일본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그 뒤 한성을 수복하기까지 한성부 및 그 인근의 경기 지역 고을은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광명시가 속해 있던 금천 지역 역시 침략의 피해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명군이 1593년(선조 26) 1월에 참전하여 전세가 변화하면서 한강 이북 지역은 어느 정도 상황이 개선되었다. 당시 경기좌도 관찰사 겸 순찰사 성영(成泳)[1547~1623]의 보고에 따르면 그해 3월경까지 경기의 한강 이남에는 일본군의 기세가 여전하여 금천 등지의 지역에서는 출몰하는 일본군에 의해 백성이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후 조명 연합군이 계속 남하하면서 금천 지역에서 일본군이 물러갔지만 지금의 광명시 등을 포함한 한성 주변 지역의 백성은 명군에 대한 지원이나 사신(使臣) 접대로 인해 다시금 큰 고통을 당하였다.
광명 지역은 임진왜란의 피해를 크게 입기는 하였지만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특별히 전해지는 유적이나 유물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임진왜란 시기 두드러진 활동을 한 광명 출신 인물이 여럿 있다. 마의였던 김응수(金應壽)[1567~ ?]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를 황해도 평산까지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 3등에 책봉되고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으며, 권형(權詗)[1541~1605]도 선조를 행재소까지 호종하였다.
강찬(姜燦)[1557~1603]은 회령에서 두 왕자가 왜군의 포로가 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공격하는 한편, 행재소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회령 사태를 보고하였다.
보다 뚜렷한 활동은 이순신(李純信)[1554~1611]과 이원익(李元翼)[1547~1634]의 경우에서 들 수 있다. 당시 첨사였던 이순신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을 도와 한산도 해전과 부산포 해전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충무공이 수군통제사가 되자 경상우수사가 되어 큰 전과를 올렸으며, 후에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해졌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당시 이조판서로서 평안도 도순찰사의 직무를 맡아 평안도로 먼저 가서 선조의 평양 파천을 준비하였으며,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여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결과]
임진왜란 당시 대사헌 김응남(金應南)[1546~1598]의 서계에 의하면 양주, 포천, 과천 등과 더불어 금천 지역의 피해가 상당히 극심하였다. 이처럼 전쟁 피해로 인해 금천 등의 고을이 큰 어려움을 겪자 결국 1593년(선조 26) 군현 통폐합이 추진되고 금천을 과천에 폐합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적으로 통합되었지만 지역 주민의 반대로 군현 폐합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한편 『선조실록(宣祖實錄)』에 따르면 금천과 과천, 장단, 양주 등지의 주민은 의병을 구성하여 수령의 지휘 하에 일본군과 맞서, 조정에서 이 공을 인정하여 역을 감면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