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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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衿川 |
영어음역 | Geumch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성격 | 행정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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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문헌 | 『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여지도서』 |
[정의]
경기도 광명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
[명칭유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금천(衿川)에서 ‘금(衿)’은 율진군(栗津郡)의 속현이었던 곡양(穀壤)을 고려 초기에 금주(衿州)[『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금천으로 기록되어 있음]로 고친 데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여겨진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1413년(태종 13) ‘주(州)’라는 명칭이 읍격에 관계없이 남용되는 것을 바로잡고자 전국적인 지명 변경 조치가 이루어져 군(郡)이나 현(縣) 등급에 해당하는 고을에 ‘주’자가 사용되었을 경우 주를 ‘산(山)’ 또는 ‘천(川)’ 등으로 바꾸었다. 이에 따라 금주도 금천으로 개칭되었다.
[형성 및 변천]
금천은 원래 백제 영토였다가 고구려의 남하 정책으로 고구려에 편입되어 잉벌노현(仍伐奴縣)이 되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뒤 757년(경덕왕 16) 곡양현으로 고쳐 율진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금주로 개칭하였고, 995년(성종 14)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수주(樹州)에 예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 지방관인 감무를 파견하였다.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414년(태종 14) 금천현과 과천현을 병합하고 금천의 ‘금(衿)’자와 과천의 ‘과(果)’자를 따서 금과현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여 다시 금천현과 과천현으로 나누었고, 다시 금천현과 양천현을 병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 1416년(태종 16) 금천과 양천을 다시 나누어 금천에 현감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과천과 병합했다가 곧 복구하였다.
1795년(정조 19) 2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고,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인 8도제를 23부제로 개편하면서 부목군현의 명칭을 모두 군으로 통합함에 따라 시흥군이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여러 차례 행정구역 개편으로 변화를 겪다가 현재는 경기도와 서울특별시의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금천이라는 지명은 행정구역상 존재하지 않다가 1995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구로구 일부 지역을 분리하여 금천구로 독립하면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금천현의 위치는 현재의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서울특별시 일부 지역으로 추정된다. 조선 전기 과천현과 분리될 당시 금천현은 동쪽으로 과천현, 남쪽으로 안산군, 서쪽으로 부평부, 북쪽으로 양천현과 이웃하고 있었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광명시[옥길동 제외]와 안양시 일부, 서울특별시 금천구·영등포구·동작구·관악구·구로구 등의 일부 지역이 포함된다.
[관련기록]
1454년(단종 2)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금천현은]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인데 신라가 곡양으로 고쳐서 율진군의 영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금천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종실록』 태종 13년 10월 15일 기사에는 “각도 각 고을의 이름을 고쳤다. …… 무릇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자를 띤 것은 모두 ‘산’자·‘천’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를 금천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발간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당시 금천의 진산은 삼성산이었으며 고적으로는 영랑성과 호암산성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