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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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衿陽縣 |
영어음역 | Geumnyang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안홍민 |
[정의]
조선 전기 광명 지역에 설치된 행정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조선 왕조를 건국한 주도 세력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중앙 집권 국가의 건설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속현(屬縣)이 많아 지방 분권적인 측면이 매우 강하였고 이 때문에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미치는 영향력은 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하여 조선 건국의 주도 세력은 지방 통치 행정에 대한 대대적인 개편을 추진하여 8도제 시행, 관찰사 파견, 수령 파견 지역 확대, 면리제 시행 등을 실시하였고 군현의 통폐합도 그 일환으로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지금의 경기도 광명시가 속해 있던 금천현(衿川縣)을 과천현(果川縣)과 통합하여 금과현(衿果縣)을 설치하였는데, 서울에서 수원까지 사객(使客)을 영송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 다시 금천현과 과천현으로 나누었고, 금천현과 양천현(陽川縣)을 병합하여 금양현(衿陽縣)을 설치하였다.
[관련기록]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금천현은] 본조(本朝) 태종 14년(1414) 갑오에 과천을 병합하여 금과현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파하였고, 또 양천현을 병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가 1년 만에 파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1413년(태종 13) 금주를 금천현으로 개칭하였고, 1414년(태종 14) 금천현과 과천현을 병합하고 금천의 ‘금(衿)’자와 과천의 ‘과(果)’자를 따서 금과현이라 하였다가 두어 달 만에 혁파하여 다시 금천과 과천으로 나누었고, 금천과 양천을 다시 병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 1416년(태종 16) 금양현을 금천현과 양천현으로 다시 나누었고, 1795년(정조 19) 2월 금천현을 시흥현으로 개칭하였다. 1895년(고종 32) 시흥군이 되었고, 광복 이후 서울과 경기의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누어졌다. 시흥군에 속해 있던 광명 지역은 1981년 광명시로 독립하였고, 금양현의 일부였던 양천현은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현황]
조선시대 금양현이었던 지역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안양시, 서울특별시 강서구·관악구·구로구·금천구·동작구·영등포구 등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의의와 평가]
금양현은 조선 전기 행정구역 개편 당시 광명시의 소속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