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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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의미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선사/선사,현대/현대 |
집필자 | 양윤모 |
[정의]
선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경기도 광명시의 역사.
[선사]
2010년 현재까지 광명 지역에서는 구석기 및 신석기시대의 유적지가 조사, 보고된 적이 없다. 그러나 목감천 등 하천 주변에 평야 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광명시의 지형적 특성으로 미루어 향후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적지 않다. 광명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한 것은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철산동 고인묘와 가학동 지석묘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적어도 B.C 4세기 이후에는 주민들이 정주하면서 일정한 사회 정치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해 B.C 3세기 이후 인근의 수원과 광주, 통진[김포] 등지에 마한에 속한 소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위치 비정을 하고 있어, 광명 지역의 고인돌 축조 집단이 소국으로 성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나, 대체로 이들 소국 중 하나의 영향력 아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삼국이 성립하기 이전 한강 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은 마한의 세력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서력 기원 전후 백제가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여 광명 지역을 세력권으로 포함시키기 전까지는 마한에 속한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서력 기원 무렵 건국한 백제가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한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에 기반하고 있던 토착 세력들을 세력권으로 재편성하면서 광명 지역 역시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광명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현재의 광명시를 비롯한 안양시 석수동·박달동, 서울특별시 봉천동·신림동·독산동·가리봉동·시흥동·당산동·대림동·문래동·신길동·양평동·상도동·대방동·신대방동 일대를 잉벌노현(仍伐奴縣)이라 칭하였다.
533년(진흥왕 14)에는 신라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뜨리고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이 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되어 신주(新州)가 되었고, 757년(경덕왕 16)에 곡양현(穀壤縣)으로 개칭되면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고려 왕조가 세워진 후인 940년(태조 23) 곡양현을 금주현(衿州縣)으로 개칭하였다. 이에 따라 광명 지역도 금주현으로 편제되었는데, 금주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기여한 강궁진과 연관하여 볼 수 있다. 금천강씨의 시조인 강궁진은 광명을 포함한 금주 지역의 호족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현재 광명시 노온사동 일대는 예부터 금천강씨의 세거지이며 금천강씨 묘역이 있어 광명 지역이 금천강씨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중앙 집권 체제가 확립된 시기는 성종 대로서, 983년(성종 2) 최초의 지방 제도인 12목제(牧制)가 실시되었다. 고려는 995년(성종 14)에 전국을 10도제(十道制)로 편제한 후, 양주(楊州)·광주(廣州)·황해(黃海) 등 여러 주현(州縣)을 통합하여 관내도(關內道)라 하고, 이어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을 관할케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켜 경기(京畿)라 칭하였다. 현종대 금주는 양광도에 속하여 안남도호부의 예속 하에 있었다. 1069년(문종 23) 전국이 50개 군으로 확장될 때 금주는 처음으로 경기도 관할 하에 속한 뒤, 1390년(공양왕 2) 경기도를 좌우로 분정할 때 경기좌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조선은 1413년(태종 13) 8도제(道制)를 단행하면서 금주를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후기인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현을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했는데, 본래 시흥은 고려 성종 대 금주현의 별호였다. 이 시기 광명 지역의 상황을 잘 나타내 주는 자료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이 인문 지리지에는 지금의 광명 지역에 대한 인구 및 방리 명칭과 범위가 표시되어 있다. 대체로 이 책에 의거해서 조선 후기 광명 지역의 상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금천현의 하위 방리는 6개 면(面)과 39개 리(里)로 편재되어 있다. 이 중에서 지금의 광명 지역에 해당하는 방리는 서면의 일직리와 사건우리[자경리]·소하리·철산리·사성리 등과 남면의 유등리·아방리·노온사리·광명리·광화대리 등이다. 이 서면과 남면은 금천현 관문에서 각각 10리와 15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여지도서』의 기록으로 보아 현재 광명 지역 대부분이 금천현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금천현의 총 호수(戶數)는 1,873호이며, 남자는 3,322명, 여자는 4,441명으로, 모두 7,763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1684년(숙종 10)의 호구 조사 기록을 인용한 것이므로 『여지도서』가 편찬될 때인 1700년대 중반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통계는 금천현 전체의 호수를 나타내고 있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 광명 지역의 대표적 인물로는 청백리로 유명한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을 들 수 있다. 이원익과 관련해서는 인조에게 하사받은 사저인 관감당 등 여러 유물과 유적이 현재도 잘 남아 있다. 이외에도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와 72년간 관직에 있으며 6차례 영의정을 지낸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1783~1873] 등이 유명하다.
[근대]
1895년(고종 32) 시흥현은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되어 인천부(仁川府)로 들어갔고, 이듬해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국권을 강탈당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인 1911년 광명 지역은 시흥군 남면과 서면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안산·과천 3개 군이 시흥군으로 흡수, 통합되어 9개 면(面) 83개 리(里)로 편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광명 지역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수탈에 맞선 항일 운동이 일어났으며, 3·1운동 이후에는 농촌 계몽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 광명 지역은 시흥군 남면과 서면으로 편제되어, 현 광명시의 모체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현대]
1945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남쪽에는 미국에 의해 시행된 미군정이 유일한 합법 정부로 기능하였다. 광명 지역은 행정적으로 일제강점기와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해방 후인 1949년 8월 14일에 시행된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북면의 도림리·구로리·번대방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고, 1962년 11월 21일 공포된 법률 제1172호에 따라 신동면 전역과 동면의 시흥리·독산리·신림리·봉천리·가리봉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0년 6월 10일에는 시흥군 조례 제199호에 의해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의 2개 법정리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법률 제2597호에 따라 시흥군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74년 6월 1일에는 시흥군 조례 제401호에 따라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76년 4월 20일 7개의 분소(分所)가 설치되었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법률 제3425호에 의해 소하읍과 시흥군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따라서 광명시의 현대사는 198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