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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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億載 |
영어음역 | Yi Eokjae |
이칭/별칭 | 대년(大年),함천군(咸川君),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지석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종친.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년(大年). 증조할아버지는 태종의 아들인 익령군(益寧君)이고, 할아버지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이며, 아버지는 청기군(靑杞君) 이표(李彪)이다. 어머니는 국자생원(國子生員) 조경(趙璟)의 딸이다. 부인 우씨(禹氏)와 혼인하였으나 자식이 없었고, 뒤에 감찰(監察) 정치(鄭錙)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이다.
[활동사항]
이억재(李億載)[1503~1584]는 문신으로 관직을 물려받아 함천부수(咸川副守)를 지냈고, 1535년(중종 30) 함천도정(咸川都正)에 올랐다. 학문에 밝았고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학문과 사상]
종친부의 사람으로 스스로의 관리와 함께 다방면의 깊은 지식을 지녔으며 역사와 음악에도 정통하여 호방한 성격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이러한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함천군은 문학을 좋아하였고 박학(博學)으로 성품이 우아하고 오성(五聲)과 율려(律呂)의 변화가 능통하였다”라고 기록되어 학문과 문예에 두루 깊은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익령군에서 함천군까지 4대 동안 국왕과 가까운 종친으로 조정에 나가 벼슬을 할 수 없어 그 명성이 드러날 기회가 없었으나, 대대로 유학으로 다져진 종친 집안으로 학문과 위의(威儀)가 있는 행동을 보였고 의리로서 뒷사람을 계발시켜 학문의 근원은 깊고 오래되었다”라고 칭송하였다. 이 밖에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는 “함천군은 학문을 좋아하였고 성률(聲律)을 마음으로 터득하였네”라고 하여 이억재의 문예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광명시 소하2동 충현박물관 경내에 있으며, 1586년(선조 19) 김보영(金普榮)이 짓고, 김광남(金廣南)이 쓴 묘갈이 함께 있다.
[상훈과 추모]
조선 제22대 정조가 이억재 묘소에 치제(致祭)한 글이 『홍재전서』에 있다. 1582년(선조 15) 함천군(咸川君)에 봉해졌다. 아들 이원익이 공신이 되자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에 증직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으며, 현록대부(顯綠大夫)의 품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