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3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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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景成 |
영어공식명칭 | Choi Kyungsung |
이칭/별칭 | 대구국채담보회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출생 시기/일시 | 1883년 1월 13일 - 최경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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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최경성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최경성 포항기독청년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7월 22일 - 최경성 신간회 영일지회 회장 선임 |
추모 시기/일시 | 2010년 - 최경성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덕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 |
거주|이주지 | 포항 - 포항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포항 - 경상북도 포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영흥학교 교장|신간회 영일지회 회장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최경성(崔景成)[1883~?]은 1883년 1월 1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사립 영흥학교(永興學校) 교장으로 있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최경성은 1919년 당시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면 포항동[현 포항시 북구 중앙동]에 거주하며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당시 대구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였던 안의와(安義窩)[James Edward Adams, 1867~1929]는 포항 지역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전파하였고, 이로 인해 포항교회가 설립되었다. 따라서 대구남성정교회와 포항교회는 모두 안의와 선교사로 인하여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최경성은 1907년 9월 12일 포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1917년 장로로 선출되었다. 1911년 신식 교육을 목적으로 사립 영흥학교가 설립될 때 교감을 맡았으며, 훗날 영흥학교가 운영비가 부족하여 폐교 위기에 처하자 교장을 맡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최경성은 대구남성정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설득으로 송문수(宋文壽)·장운환(張雲煥)·이기춘(李起春)·이봉학(李鳳鶴) 등과 함께 1919년 3월 11일 포항 지역에서 장날에 맞추어 만세 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웠고, 포항 만세 시위에 앞서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날 만세 시위에서 157명이 검거되었으며, 67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최경성은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경성은 출옥한 후인 1922년 구성태·박도원·이봉학·정극삼·정수용·김은덕·이재우·김철우 등과 포항기독청년회를 설립하였고, 1923년 개최된 총회에서 총무로 선출되었다. 최경성은 1927년 6월 3일 김영옥·권의봉·김화섭·정학선·이재우 등과 ‘신간회 영일지회 설립준비대회’를 개최하여 설립 준비를 마쳤고, 1927년 7월 22일 신간회 영일지회가 설립되자 회장을 역임하였다. 신간회 영일지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들이 함께 결성하였는데, 최경성은 포항기독청년회 소속으로 비타합적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최경성의 공적을 기려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