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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60
한자 朴齊元
영어공식명칭 Park Jew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4년 5월 6일연표보기 - 박제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박제원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61년연표보기 - 박제원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1년연표보기 - 박제원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남산동 -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거주|이주지 김천 - 경상북도 김천시
활동지 김천 - 경상북도 김천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김천예수교회 전도사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제원(朴齊元)[1884~1961]은 1884년 5월 6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김천예수교회 전도사로 재임하며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박제원은 3월 7일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을 만나 대구의 만세 시위 계획에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평양 숭실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무생(金武生)과 함께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임봉선(林鳳善)을 찾아가 여학생들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8일 이만집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박제원도 시위대에 합류하여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박제원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함께 참여한 김천 출신의 계성학교 학생 김수길과 함께 김천으로 돌아갔지만, 3월 9일 김수길과 등과 김천에서의 만세 시위를 계획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제원은 1961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제원의 공적을 기려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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