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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71
한자 朴泰鉉
영어공식명칭 Park Taehye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9년 7월 14일연표보기 - 박태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박태현 계성학교 5학년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박태현 대구 동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74년 4월 1일연표보기 - 박태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2년연표보기 - 박태현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침산동 -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박태현(朴泰鉉)[1899~1974]은 1899년 7월 1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서 태어났다. 계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대구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대구에서도 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대구 성경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은 3월 9일에 학교와 서문시장 인근의 달성공원에서 2차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나 시위 계획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에 박태현계성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 그리고 김윤덕(金潤德)·김재병(金在炳) 등과 협의하여 3월 10일 덕산정 동문시장에서 2차 만세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박태현 등은 3월 10일 오후 4시 30분 무렵 장꾼으로 가장한 채 동문시장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1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박태현 등 시위 주동자들을 따라 열을 지어 행진하려 하자 대구경찰서 소속 일제 경찰이 출동하여 폭력적으로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이때 박태현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8월형이 확정되었다. 박태현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태현은 1974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박태현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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