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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82
한자 鄭元祚
영어공식명칭 Jung Wonj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3월 23일연표보기 - 정원조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9년 - 정원조 대구 계성학교 6년 재학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정원조 대구 서문 시장 만세 시위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42년 5월 26일연표보기 - 정원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5년연표보기 - 정원조 대통령표창 추서
출생지 대신동 -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학교|수학지 계성학교 - 대구광역시 중구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정원조(鄭元祚)[1898~1942]는 1898년 3월 2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가계]

정원조는 신정교회 목사로 봉직하며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한 정재순(鄭在淳)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였던 백남채(白南採)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8일 정원조심문태(沈文泰)·김삼도(金三道)·박태현(朴泰鉉)계성학교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귀가를 가장하고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 성경학교·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정원조도 아버지 정재순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원조는 1942년 5월 2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정원조의 공적을 기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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