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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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湧海 |
영어공식명칭 | Kim Yongh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일수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7월 26일 - 김용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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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8일 - 김용해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19년 4월 13일 - 김용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김용해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묘소 | 국립신암선열공원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동 산27-1]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용해(金湧海)[1897~1919]는 1897년 7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가계]
김용해는 남산교회 조사로 봉직하며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한 김태련(金兌鍊)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대구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1919년 2월 16일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와 조카딸 김마리아가 당시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였던 백남채(白南採)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신정교회 목사 정재순(鄭在淳),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洪宙一), 의료계에 종사하던 정광순(鄭光淳),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金永瑞)를 비롯한 교사 백남채·김태식(金台植)·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최상원(崔相元), 신명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이재인(李在寅)·임봉선(林鳳仙)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였다.
1918년 3월 8일 오후가 되자 서문시장 주변에 만세운동 관련자들과 학생들을 포함한 7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날 김용해도 아버지 김태련의 권유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만집의 연설과 김태련의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난 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서서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김용해는 일본 군경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던 아버지 김태련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자신도 집단 폭행을 당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대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김용해는 3월 29일 석방되었으나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인해 4월 13일 순국하였다.
[묘소]
김용해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산27-1 국립신암선열공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용해의 공적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