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9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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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泰鶴 |
영어공식명칭 | Lee Taehak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삼조 |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태학(李泰鶴)[1890~1962]은 1890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활동 사항]
이태학은 의성군 운산면에 있는 장로파 예수교회 조사(助事)였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자 평양으로 가던 중에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후 대구에 가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고 3월 7일 대구에 도착하여 성경학교(聖經學校) 기숙사에 머물며 강습생들에게 만세 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하였다. 이복건(李福健) 등 강습생들로부터 이튿날인 3월 8일에 만세 시위가 계획되어 있으며 성경학교 강습생들도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태학도 함께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8일 이태학은 성경학교 강습생 20여 명과 함께 서문시장 근처에 집결하였다. 오후 3시가 되자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 목사 이만집(李萬執)의 연설과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金兌鍊)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신명여자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시위 군중은 순식간에 7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서문시장을 나선 시위대는 대구경찰서와 종로를 거쳐 동성로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이태학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대열을 이끌었다. 시위대가 동성로에 있던 달성군청에 이르자 기관총과 착검한 소총으로 무장한 일제 군경은 시위 군중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여 157명을 검거하고 그중 67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때 이태학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았고,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태학은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7월 2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태학은 1962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학의 공적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