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92 |
---|---|
한자 | 鈒巖 |
영어의미역 | Sabam Rock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
집필자 | 강정화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고려 후기 한유한이 은거하였던 바위.
[개설]
삽암(鈒巖)은 섬진강 가에 솟아 있는 하나의 바위이다. 우리말로 ‘꽂힌 바위’라 부르는데, 하동군 악양면 사람들은 ‘섯바구’ 또는 ‘선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남해와 섬진강의 어선들이 정박하였고, 영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니던 곳이었다. 삽암은 고려 말의 은자인 한유한(韓惟漢)이 난세를 피해 처자식을 이끌고 와서 은거한 곳으로 유명하다. 후에 조정에서 한유한을 불러 대비원녹사(大悲院錄事)로 삼았는데, 그날 저녁에 달아나 간 곳이 묘연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 백의종군하기 위해 임지로 가며 지나간 자리,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해 죽은 청춘 남녀의 사랑이 맺힌 바위라 알려져 있으며,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바위를 굴려 적을 물리친 자리라고도 하나, 이는 후세에 덧붙여진 일화이다.
[건립 경위]
삽암은 한유한이 난세를 피해 은거하였던 곳으로, 한유한의 삶의 처세와 함께 세상에 묻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조선 중기의 실천적 유학자인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하동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고 지은 「유두류록(遊頭流錄)」에 삽암과 한유한의 삶을 기록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삽암은 조선 시대 하동 청학동을 유람하는 선비들이 반드시 거쳐 가는 유람 코스가 되었고, 한유한의 은자적 삶은 지식인의 경세적(經世的) 삶의 표상으로 자주 거론되었다.
[위치]
하동 읍내를 지나 왼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화개10리 벚꽃길을 달리다 보면 오른쪽에 넓디넓은 악양 들판이 나타난다. 악양 들판이 끝나는 지점인 삼거리 왼쪽에 조그마한 바위가 솟아 있는데, 이 바위가 바로 삽암이다.
[형태]
삽암은 현재의 포장된 도로에서 보면 조그마한 바위에 불과하며, 그 위에 비석 2기가 세워져 있다. 섬진강에서 올려다보면 바위 끝에 ‘모한대(慕韓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지리산 유람록에 의하면, 삽암에는 ‘취적대(取適臺)’ 혹은 ‘취적대(吹笛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황도익(黃道翼)[1678~1753]이 찾았을 1744년(영조 20)에만 해도 이 세 글자의 석각이 마모되어 자획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삽암 관련 기록은 대체로 섬진강에서 올려다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현황]
삽암은 그 역사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여 2011년 현재는 그저 길게 늘어선 섬진강 가의 한 바위일 뿐이다. 도로 포장으로 인해 길을 높이면서 바위의 위용이 없어져 버렸다. 삽암을 알리는 입간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차시킬 만한 공터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쳐도 모를 정도이다. 그러나 섬진강 쪽에서 삽암을 올려다보면 여전히 우뚝한 위용을 지닌다.
[의의와 평가]
하동 청학동 일대를 유람한 기록에 의하면, 삽암은 근세까지도 지조와 절의의 상징으로 칭송되었던 명승지였다. 삽암 꼭대기에 세운 2기의 비석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주변을 정리한 후 안내판을 세워, 삽암과 관련한 역사적 의의를 인식시키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