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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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鍤巖-朴敏- |
영어의미역 | Sabam Rock by Bak Mi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호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5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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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630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616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외둔마을 |
성격 | 한시|유산시 |
작가 | 박민(朴敏)[1566~1630] |
[정의]
1616년 박민이 한유한의 유적지인 경상남도 하동군의 삽암에서 읊은 한시.
[개설]
「삽암(鍤巖)」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박민(朴敏)[1566~1630]의 문집 『능허집(凌虛集)』 권1에 수록되어 있다. 박민이 하동을 여행하면서 삽암(鍤巖)에 이르러 지은 것이다. 박민은 1616년(광해군 8) 9월 성여신(成汝信) 등 진주 인근의 여러 유학자들과 함께 지리산[1,915m] 청학동 일대를 유람하였다.
박민은 주거지인 진주를 출발하여 하동→악양→쌍계사(雙磎寺)→신응사를 거쳐 진주로 돌아오는 14박 15일간의 일정으로 유람하였으며, 이때의 유람 이후 「두류산선유기(頭流山仙遊記)」라는 유람록을 남겼다. 「삽암」 또한 이 유람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고려 후기 어지러운 정치를 피해 지리산에 은거하였던 한유한(韓惟漢)의 유적지인 하동의 삽암에서 주변 경치와 함께 한유한의 풍도를 생각하며 읊었다.
박민이 시의 제목 아래에 “고려 말에 녹사 한유한이란 사람이 이곳에 은거하였다[麗末有韓錄事惟漢 隱居於此]”라고 밝힌 바와 같이, 삽암은 고려 후기 대비원녹사(大悲院錄事)에 임명되자 가족을 이끌고 지리산에 은거하였던 한유한과 관련이 있는 유적임을 알 수 있다.
[구성]
칠언 절구의 구성법에 맞게 전개한 한시이다. 기구에서는 삽암 가를 흐르는 시내의 모습을 묘사하였고, 승구에서는 바로 이 바위 가에서 한유한이 살았음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전구에서는 대비원녹사에 임명되자 처자를 이끌고 도망하여 지리산에 은거하였던 것을 읊었으며, 결구에서는 천년의 오랜 세월 동안 한유한만이 신선의 자취를 보였다고 노래하였다.
[내용]
석백계청무점루(石白溪淸無點累)[바위는 희고 시내는 맑아 한 점 티끌도 없는데]
석인수복차암변(昔人誰卜此巖邊)[옛 사람 가운데 누가 이 바위 가에 살았던가?]
사륜입동유원주(絲綸入洞踰垣走)[임금의 명이 고을에 들어감에 담 넘어 달아나니]
방장천추독일선(方丈千秋獨一仙)[방장산에는 천년 동안 유독 이분만 신선 같다]
이를 풀이하면, 제1구에서는 삽암 가의 시내에 맑은 물이 흐르고 하얀 돌이 있는 청정무구한 모습을 드러내었고, 제2구에서는 짐짓 모른 척 의문을 던지고 있지만, 삽암 가에 살았던 인물은 다름 아닌 한유한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제3구에서 ‘사륜(絲綸)’은 임금의 조칙(詔勅)을 가리키는 말로,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왕언여사기출여륜(王言如絲其出如綸)”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대비원녹사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이 한유한이 살던 골짜기로 들어오자, 처자를 데리고 담을 넘어 어디론가 달아났다는 행적을 말한 것이다. 제4구에서는 한유한 이후 박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근 천여 년 동안 이만큼 신선 같은 행적을 보인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의의와 평가]
「삽암」은 한유한이 은거하였다는 삽암 부근의 경치를 묘사하고, 조정을 떠나 삽암에 물러나 살았던 한유한을 인간이 아닌 진정한 하나의 신선이었다고 기리고 있다. 삽암과 한유한에 대해 읊은 시의 하나로, 삽암의 승경을 널리 알리는 동시에 한유한에 대한 조선 후기 학자의 인식과 당시 선비들의 지향점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