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500136
한자 楡湖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윤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청도군 대성면 유호동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40년 - 청도군 대성면 유호동에서 청도군 청도면 유호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49년 - 청도군 청도면 유호동에서 청도군 청도읍 유호동으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8년 - 청도군 청도읍 유호동에서 청도군 청도읍 유호리로 개칭
성격 법정리
면적 4.05㎡
가구수 211가구
인구[남,여] 446명[남자 213명, 여자 233명]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유호리는 고려 때부터 유천역이 있었던 마을이기 때문에 유천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관공서가 유호리에 포진하면서 유천하면 유호와 내호가 함께 불려진다. 유호리내호리는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내호와 유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명칭 유래]

유호리는 옛 기록에는 모두 유천(楡川)으로 쓰고 있는데, 제방에 느릅나무를 심어서 유천이라고 했다고 하나 음차(音借)한 것으로 보인다. 청도천동창천이 만나서 응천(凝川)이 되어 밀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유천(流川)이라는 말이 유천(楡川)으로 쓰였다고도 전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청도군 하남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어린동을 병합하여 유호동이라 하고 대성면에 편입하였다. 1940년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명하면서 청도면 유호동이 되었고, 1947년 청도면이 청도읍으로 승격하면서 청도읍 유호동이 되었다. 1988년에 유호동에서 유호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 때부터 유천역이 있었던 마을로서, 행정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고려 시대부터 있었던 역(驛)과 관(館)은 청도천 서쪽에 있었고, 철도가 개설되면서 만들어진 철도역 역시 그곳에 머물렀었다. 역이 있었던 곳은 마을이 크게 번성하기엔 자리가 비좁아서 강 건너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관청과 관련된 행정 중심이 유호리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에서는 처음으로 사립 학교가 생겼고 항일 운동이 거세게 진행되었으며, 집집마다 유천 소주를 만들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경찰관 주재소와 우체국이 있었다.

1959년에 있었던 태풍 사라 때는 동창천의 물이 세력이 강해서 청도천의 물의 나갈 곳이 없게 되자 마을로 역류하여 마을 대부분이 피해를 입었다.

[자연 환경]

용각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유호리내호리와 함께 강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신도리에서 내려온 청도천이 어린에서 굽이 돌아 조들 앞을 지나 분등산을 감돌아 동창천과 합류하는 지점인 응천(凝川)에 이른다.

[현황]

2012년 현재 면적은 4.05㎡이며, 총 211세대에 446명[남자 213명, 여자 233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청도읍 사촌리, 서쪽은 청도읍 신도리·초현리, 남쪽은 청도읍 내호리·경상남도 밀양시 상동면 옥산리, 북쪽은 청도읍 거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유호 1리유호 2리가 있으며, 조들·유천 등의 마을이 있다.

유호리는 조들 앞만 경작지가 있고 다른 곳에는 논농사를 지을 땅이 많지 않다. 강가에 위치한 마을 인근의 경작지로는 산비탈에 약간의 밭이 있을 뿐이며, 주민 대부분은 상업으로 생활해 왔다. 중앙 고속 도로가 유천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25호선청도천을 따라 유천리를 굽이쳐 지나간다. 유천 시장이 매 3일과 8일에 열리고 있다.

청도읍사무소 유호 출장소가 있으며, 유호 보건 지소와 유천 우체국, 유호 치안 센터가 있고 초등학교는 유천 초등학교가 있다. 시조 시인 이호우, 이영도 남매의 옛 집이 등록 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어 있고 남매 시조 공원이 있다. 옛 근현대의 문화유산으로는 1960년대에 지어진 유천 극장이 있고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던 정미소를 비롯하여 일제 강점기 때의 건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문화재로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309호인 청도 대운암 목조 관음보살 좌상 및 복장 유물유호리 산1-1대운암에 보관되어 있다. 옛 보건소가 있었던 곳에서 어린으로 넘어가는 옛길에는 군수의 선정비가 담 속에 박혀 있기도 하다.

옛날 마을은 산 위쪽에 형성되었다가 큰 길이 생기면서 차츰 아래로 내려와서 형성된 것이다. 지금도 옛날 선사 시대의 흔적들은 대부분 마을 뒤쪽 산등성이에 남아 있다. 마을의 위쪽 산등성이에는 선사 시대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으로 뗀 석기 조각과 돌칼 조각들이 밭에서 간간이 발견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