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6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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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시기의 전라북도 순창 지역의 역사.
[행정 구역]
1897년(고종 34) 18면이던 순창군은 1914년 인화면과 호계면을 합해 인계면, 풍실면과 오산면을 합해 풍산면, 팔등면과 덕진면을 합해 팔덕면, 상치면과 하치면을 합해 쌍치면, 남원군의 영계와 아동면의 구미·어치·동심을 편입해 동계면을 만들어 기존의 좌부면, 우부면, 금동면, 목과면, 복흥면, 적성면, 유등면, 구암면, 무림면과 함께 14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7년에는 다시 좌부면과 우부면을 합쳐 순창면으로 하여 13면이 되고, 1919년에는 금동면과 목과면을 합해 금과면을 만들어 12면 126리가 되었다. 1935년에는 구암면과 무림면을 합해 구림면으로 하여 11면 131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9년 당시 순창군 면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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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상황]
1910년 10월 1일 조선 총독부가 설립되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첫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헌병 경찰 제도(憲兵警察制度)가 실시되었고 조선인들에게는 조선 태형령(朝鮮笞刑令), 즉결 처벌권(卽決處罰權) 등이 행해졌다. 또한 여러 법령이 통과되었는데 1911년 「삼림령」과 1916년 임야 조사 사업을 통해 전체 산림 가운데 60% 이상을 국유림으로 하였고, 국유림에서는 가축 방목이나 땔감 채취 등을 금지하였다.
이후 「어업령」을 공포하여 한국의 어업권을 부인하고 일본인 중심으로 어장을 재편성하였다. 1915년 「광업령」을 공포하여 일본인의 독점권을 강화함에 따라 전체 광산의 75% 이상을 일본인이 점유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기업의 발흥과 조선인 자본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해 「회사령」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456만 원이라는 거액을 들여 토지 조사 사업을 시행하였다. 순창에서도 1914년 7월 중순부터 토지 조사 사업 준비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수탈 하에서 순창 군민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1933년 전북 일보사에서 편찬된 『전북 안내』에 의하면 1931년 말 호수는 1만 4440호, 인구는 7만 733명으로 해마다 증가세를 보였다. 토지 총면적은 4만 5484정(町) 5반(反)이고, 그중 논은 7,226정 8반, 밭은 4,323정 6반, 집터는 505정 6반, 잡종지는 6정 5반 6무(畝), 임야는 3만 3297정이었다. 기타 123정은 대부분 임야이었다.
농업을 보면, 1931년 쌀은 10만 2032석, 보리 5만 3747석, 콩류 1만 281석을 생산하였다. 잡곡 특용 작물도 적지 않아 내륙지별 수확 수는 약 1,000정보(町步)로 아주 우수한 실적을 보이고 있다. 잠업은 1931년 수확량이 210정이며, 사육 호수는 4,565호이고, 누에떨기[掃立] 수는 3,894교(枚), 누에고치[産繭]는 1,954석을 생산하며 이후 증가하는 추세를 나타낸다.
[민족 운동]
일제 강점기 순창을 대표하는 민족 운동은 1919년 3·1 운동이다. 순창에서는 박동진(朴東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박동진은 1919년 3월 15일 밤 자택에서 「조선 독립단 만세」, 「조선 독립단 독립 만세」 등의 문서 세 통을 작성하여 3월 17일 오후 1시경 순창군청, 순창 헌병 분견소 및 순창 학교 앞 게시판에 붙여 전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음을 알렸다. 3월 20일 밤에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순창 군민 200여 명이 순창읍 뒷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11일 장날 아침에는 ‘독립 만만세! 오늘 11일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이니 모두 모이라. 만약 헌병이 출동할 때에는 모두 죽여라!’는 내용의 격문이 붙었기에 일본은 증파되어 오는 보병대 일부를 순창읍에 배치하였다.
이후 박동진이 4월 24일 자택에서 “1919년 4월 26일 순창 장날에 순창 군민은 20세부터 50세까지 전부 집합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독립 만세를 외치자. 만일 만세를 부르다가 죽더라도 이후 우리 외의 독립을 계획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열심히 안심하고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을 쓴 종이 한 장과 “1919년 4월 26일은 독립 만세를 부르자. 조선인을 죽이려면 죽여라. 독립 만세를 부를 사람은 51명이나, 이들을 죽여도 대신할 165명이 있으니 51명을 죽여도 아무 소용없다. 또한 우리들이 죽어도 마침내 독립을 도모할 자가 5,000만 명이 있으니 죽일 터이면 죽여라”는 글을 쓴 종이 한 장을 작성하여 4월 25일 오전 1시경 전자는 순창면사무소 게시판에, 후자는 게시판 부근 돌담에 붙여 사람들을 독려하였다.
또한 우치홍(禹致洪)은 서울 보성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탑골 공원에서의 3·1 운동을 목격하고 3월 7일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독립 선언서 200장과 『독립신문』 150장을 가지고 귀향길에 올라 이리역에서 내려 도보로 전주(全州)·진산(珍山)·무주(茂朱)·진안(鎭安)·임실(任實) 등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천도교구실 혹은 지사들의 집을 찾아 순창으로 들어오던 중 인계면 쌍암리(雙岩里) 거릿집에서 미행하여 온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문명근(文明根)은 ‘관리는 이번에 동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조선 독립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순창 군수 앞으로 보냈다. 정순환(鄭順煥)의 경우도 4월 11일 순창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를 주도하기로 결심하고 4월 10일 밤 자택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쓰고 그 옆에 ‘음력 3월 11일 시장에서 백성들이 일심으로 힘을 합하여 만세를 호칭하기를 바란다. 헌병이 나와서 금지시키면 모두 일어나 베어 버리고 만세를 호창하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내용을 기재하였다. 4월 11일 오전 10시경 전날 작성한 문서를 지니고 순창 장터로 나가 정육점에 이를 붙이기를 부탁하고 주민들에게 독립 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순창인들의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3·1 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결국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20년대에 들어 헌병 경찰 통치 제도가 보통 경찰제로 변화되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는 등 문화 통치가 표방되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사회 운동 단체가 나타났다. 순창에서도 1920년 순창 청년회(淳昌靑年會), 1924년 순창 청년 동맹(淳昌靑年同盟), 1925년 동계 청년회(東溪靑年會), 1926년 순창 기독 면려 청년회(淳昌基督勉勵靑年會), 1928년 순창 청년 동맹 인계 지부(淳昌靑年同盟仁溪支部), 1928년 순창 청년 동맹 유등 지부(淳昌靑年同盟柳等支部), 1928년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淳昌靑年同盟金果支部) 등이 만들어져 활동하였다.
[교육]
일제는 식민 통치의 기조로 동화 정책을 내걸고 이에 걸맞은 식민지 교육 정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조선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고, 일본의 정책을 홍보하여 충량한 식민지 백성의 육성을 도모하였다. 이를 위하여 각지에 보통학교가 만들어졌다. 순창군에도 1911년 9월 11일 사립 순화 학교[순창 공립 보통학교, 뒤의 순창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1913년 5월 10일 쌍치 공립 보통학교, 1920년 12월 1일 동계 공립 보통학교, 1922년 5월 10일 구림 공립 보통학교, 1924년 4월 21일 금과 공립 보통학교, 1925년 4월 10일 복흥 공립 보통학교, 1925년 4월 29일 유등 공립 보통학교, 1927년 6월 1일 인계 공립 보통학교, 1930년 5월 12일 팔덕 공립 보통학교, 1932년 4월 16일 풍산 공립 보통학교, 1935년 5월 23일 적성 공립 보통학교가 연달아 개교하였다.
고등 교육 기관으로는 1942년 5월 1일 순창 농림 고등학교[현 순창 제일 고등학교]가 설립하여 개교하였다. 순창 농림 고등학교는 지산(芝山) 김영무(金英武)가 독립 의지를 육영 사업으로 전환하여 사재 50만 원[논 5,000두락]을 쾌척하여 설립한 학교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순창군에서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한 보통학교는 속속 설립되었으나 고등 교육 기관은 한 곳에 불과하였다. 보통학교는 우민화 차별 교육이 시행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군민들로 하여금 문맹을 벗어나는 교육 기관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일제 강점기 순창에는 중등학교가 없어 서울, 전주, 광주 지역에 유학을 하였는데 특별한 재산가 가정이 아니면 중등 교육의 유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김영무의 순창 농림 고등학교 설립은 순창의 교육 수준 향상에 획기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