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0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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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英武 |
이칭/별칭 | 지산(芝山),김대희(金大熙),금전영무(金田英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10월 20일 - 김영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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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1년 4월 1일 - 김영무 니혼 대학 법률과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3년 3월 30일 - 김영무 메이지 대학 법과 편입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7월 30일 - 김영무 메이지 대학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16년 - 김영무 조선총독부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임용, 광주 지방법원 순천 지청 근무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김영무 순창 공립 보통학교 학무 위원, 순창청년회 창립, 호남 은행 대주주 참여, 민선 전라북도 도평의회원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김영무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김영무 호남 은행 이사 재직, 동아 일보 순창 지국 고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김영무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 하사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김영무 관선 전라북도 도평의회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김영무 조선 나예방 협회 감사, 순창-담양 철도 속성 운동 관민 대표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김영무 전라북도 농회 부회장, 전라북도 농회 통상 의원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김영무 광주 선광 상사 감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김영무 조선 지업 감사, 순창 번영회 회장, 공화자동차운수 감사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1년 - 김영무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전라북도 이사, 흥아 보국단 준비 위원, 조선 임전 보국단 전라북도 발기인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김영무 순창 공립 농림 학교 설립 |
활동 시기/일시 | 1943년 - 김영무 순창 금융 조합 감사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 김영무 사망 |
출생지 | 김영무 출생지 - 전라북도 전주시 |
학교|수학지 | 메이지 대학 법과 전문부 - 일본 |
활동지 | 김영무 활동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 |
묘소 및 동상 | 순창 제일 고등학교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담순로 1411[장덕리 100] |
성격 | 교육자|관료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대표 경력 | 전라북도 도평의회원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활동한 교육자이자 관료.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지산(芝山), 본명은 김대희(金大熙), 일본식 이름은 금전영무(金田英武). 아버지는 광양 군수(光陽郡守) 김우근(金宇根)인데, 큰아버지인 참봉(參奉) 김택근(金澤根)의 양자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김영무(金英武)[1891~1953]는 1891년 10월 20일 전주군 전주면 본정(本町)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4월 1일 도쿄[東京]의 니혼 대학[日本大學] 법률과 전문부 정과(正科)에 입학하였으나, 1913년 3월 30일 퇴학하고 같은 날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법과 전문부 정과 2학년에 편입하여 1914년 7월 30일에 졸업하였다. 1916년 11월 29일 조선 총독부 재판소 서기 겸 조선 총독부 재판소 통역생에 임명되었다.
1918년 퇴직 후 순창에 자리를 잡았다. 1920년부터 순창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였다. 1920년 3월 순창 공립 보통학교 학무 위원(學務委員)을 지냈으며, 7월에는 순창 청년회(淳昌靑年會)를 창립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0년 8월 호남 은행이 생길 때에는 1,000주를 가진 대주주로 참여하여 1925년 무렵부터는 이사로 재직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민선 전라북도 도평의회원(道評議會員) 선거에서 당선하는 등 순창 지역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였다.
1924년 4월부터 1927년 4월까지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를 지내며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았고, 같은 해 5월 민선 전라북도 도평의회원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이는 1924년 많은 활동의 덕으로 보이는데 김영무는 1924년 한 해만 해도 순창 재향 군인 분회(淳昌在鄕軍人分會) 고문, 순창군 농회(淳昌郡農會) 부회장, 전라북도 농회 특별 의원, 순창군 삼림 조합 부조합장, 순창군 학교 평의회원(評議會員), 전라북도 농회 통상 의원(通常議員), 조선 산림회 평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5년 10월 동아 일보사 순창 지국 고문이 되었고, 1928년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 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0년 6월 전라북도 농회 상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이미 이때 순창군 일대에 약 300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1931년 2월 보궐 선거로 전라북도 도평의회원에 임명되었다. 1933년 4월에는 조선 나예방 협회(朝鮮癩豫防協會) 감사를 지냈으며, 같은 해에 순창-담양 철도 속성 운동 관민 대표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런 활발한 활동은 1935년 10월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가능하게 하였다.
김영무는 관직뿐 아니라 사업체와도 연관이 많았는데 1935년 광주 선광 상사(鮮光商事) 감사, 1936년 6월 조선 지업(朝鮮紙業) 감사, 1936년 11월에는 전주에 있는 공화 자동차 운수(共和自動車運輸)의 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40년에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식전 및 봉축식에 초대받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2월에는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이사로, 8월에는 흥아 보국단 준비 위원으로, 9월에는 조선 임전 보국단 전라북도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0월에는 이사를 맡았다. 1942년에는 1938년부터 추진하였던 순창 공립 농림 학교(淳昌公立農林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이때 들어간 돈이 50만 원 또는 쌀 6,000석이라고 전해진다. 건학 이념은 ‘거정행화(居正行和)’였다. 1943년 순창 금융 조합 감사에 취임한 후 1953년 5월 30일에 사망하였다. 2009년 편찬된 『친일 인명사전』에 친일파로 기록되었다.
[묘소]
학교가 보이는 순창군 순창읍 금산 공동묘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해는 금산에 안장되었다가 1968년 순창 제일 고등학교 내로 묘지를 옮겼다.
[상훈과 추모]
매년 한식날에 순창 제일 고등학교에서 추모제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