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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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敎育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허영주 |
[정의]
조선 시대부터 현대까지 전라북도 순창군의 교육.
[개설]
교육은 인간의 심신 가치를 높이고 내부적 능력을 계발하여 미숙 상태를 성숙 상태로 이끌어 자기 형성을 보조해 가는 인간 활동이며, 태교부터 시작하여 일생 동안 단절 없이 계속된다. 순창군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교육은 삼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일제 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학·사학을 막론하고 시대적 환경과 궤적을 같이하면서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순창군의 사료를 접할 수 없는 한계성이 있어 조선 시대부터 순창군 교육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조선 시대는 정치 이념으로 유교를 채택하였으며,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사대부들에게 선택적으로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다. 지방 교육 기관인 향교(鄕校)가 들어서고 유림에서 운영하는 서원(書院)과 사립 학원 성격을 띠는 서당(書堂)이 설립되었으며,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중심으로 교육되었다.
1. 향교와 서당
순창 향교(淳昌鄕校)는 순창군 순창읍 교성리에 있는 향교로, 1489년(성종 20)에 전라도 관찰사 이숙감(李淑瑊)이 향교 비명을 썼다고 전해지니 사료적 근거로 보아 1489년에 건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학(私學)의 형식을 띤 서당은 초등 교육 기관의 기능이 있었다. 1649(효종 즉위년)~1659년(효종 10)에 공포된 서당의 학규를 살펴보면, 훈장은 고을에서 적임자를 선출하되 대학 장의(大學掌議)의 예에 준하여 예우하고, 고을 수령들이 수시로 서당을 돌아보며 교육에 뛰어난 공이 있는 훈장에게는 면세와 동몽교관(童蒙敎官) 관직을 주어 서당 교육을 장려하였다.
순창군의 대표적인 서당으로는 훈몽재(訓蒙齋)를 들 수 있다. 훈몽재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1548년(명종 3)에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어암 마을에 낙향하여 세운 서당으로 당초 훈가(訓家)였다.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으나 중수하여 자연당과 양정관, 삼연정을 더 세워 신세대들에게 한학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하였는데, 현재까지도 활용되는 서당이다. 관 서당(官書堂)은 1878년(고종 15)에 관청에서 세운 서당으로 지금 천주교 앞마당 자리에 있었다. 설문덕(薛文德), 구형서(具亨書) 훈장의 공덕을 80세 이상의 유림 인사들은 기억하고 있으며, 마을 명칭을 서당 이름에 따라 관 서당이라고 하였다. 중산 서당(中山書堂)은 1888년(고종 25)에 순창군 인계면 중산리 중산 마을 뒤 건지산 아래에 세운 서당으로 수 년 전 까지만 해도 서당 건물이 있었는데 낡아 무너져 없어지고, 2022년 현재는 그 자리에 2013년에 건립된 표지석만 남아 있다.
2. 서원과 사우
선현을 봉사(奉祀)하고 자제를 교육하는 서원은 1541년(중종 36) 경상북도 영주 죽계에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 서원(白雲洞書院)을 처음 설립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설립자에 따라 문중(門中), 공립(共立)[타성 공동 설립], 향립(鄕立)으로 구분된다.
순창군 관내에 설치되었던 서원으로는 우선 화산 서원(花山書院)을 들 수 있다. 화산 서원은 1607년(선조 40) 9월 8일에 순창군 유등면 저탄(猪灘) 위에 창건하여 신말주(申末舟)·김정(金淨)·김인후(金麟厚)·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박상(朴祥)·유옥(柳沃)·신공제(申公濟)·양사형(楊士衡)·김시서(金時瑞) 등 10현을 봉안(奉安)하였는데, 1876년(고종 13)에 철폐되었다. 무이 서원(武夷書院)은 1788년(정조 12)에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무이산 아래 창건하여 주희(朱熹)를 주벽(主壁)으로 설공검(薛公儉)·설인검(薛仁儉)·조원길(趙元吉) 등 4현을 봉안하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 지계 서원(芝溪 書院)은 1788년 적성면 지북리에 창건하여 양배(楊培)를 주벽으로 이유겸(李有謙)·양사민(楊士敏)·양응수(楊應秀)[1700~1767] 등 4현을 봉안하다가 1876년에 철폐되었다.
남산 서원(南山書院)은 1800년(정조 24)에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 창건하여 권효(權曉) 1현을 봉안하다가 1868년에 철폐되었다. 어암 서원(魚巖書院)은 1827년(순조 27)에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백방산 아래에 창건하여 김인후·이이(李珥)·정철(鄭澈)·김시서(金時瑞) 등 4현을 봉안하다가 1876년에 철폐되었다. 무양 서원(武陽書院)은 1971년 5월에 순창군 팔덕면 용산리에 창건하여 기정진(奇正鎭)[1798~1879]·기우만(奇宇萬)·강대일(姜大一) 등 3현을 봉안하였다.
순창군에 설치되었던 사우(祠宇)로 예천사(禮川祠)는 1401년(태종 1)에 순창군 금과면 고례리에 창건하여 조흡(曺恰) 1현을 봉안하다가 1868년에 철폐되었다. 오산사(鰲山祠)는 1474년(성종 5) 3월에 창건하여 전우(田愚)·김교준(金敎俊) 등 2현을 봉안하였다. 호계사(虎溪祠)는 1940년에 순창군 인계면 갑동리[구 호계리]에 창건하여 임선미(林先味)[두문동 72현] 1현을 봉안하였으며, 지산사(芝山祠)는 1949년에 지산리 건지산 아래 창건하여 최치원(崔致遠)·최익현(崔益鉉) 2현을 봉안하였다. 화남사(華南祠)는 1949년에 순창군 유등면 유촌리에 창건하여 서릉(徐稜)·서식(徐湜)·서숭로(徐崇老)·서영우(徐永佑) 등 4현을 봉안하였으며, 옥산사(玉山祠)는 1957년에 풍산면 대가리에 창건하여 김일손(金馹孫)을 주벽으로 김치세(金致世)·김산경(金汕慶) 등 3현을 봉안하였다.
3. 순창에서 강학한 학자
순창에서 강학한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하서 김인후와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 백수(白水) 양응수, 노사(蘆沙) 기정진이 있다. 김인후는 전라남도 장성 사람으로 세자[후일 인종] 시강원 설서를 지내다가 낙향하여 처향(妻鄕)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훈몽재를 세우고 2년 여간 강학 활동을 하였다. 신경준은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서 태어난 귀래정(歸來亭) 신말주의 후손으로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韻解)』·『도로고(道路考)』·『군현지제』·『강계지(疆界誌)』·『산수경』·『사연고(四沿考)』 등의 저서를 남겼다. 1779년 고향에 돌아와 귀래정을 중심으로 학문과 강학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양응수는 순창군 적성면 서림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학문과 강학에 힘썼다. 「이기설변(理氣說辨)」·「지각설변(知覺說辨)」·「심기설변(心氣說辨)」 등 『백수집(白水集)』 30권 17책을 남겼다. 『백수집』은 조선 성리학 발전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 순창군과 성균관, 중앙 관련 부서가 협력하여 번역에 앞장서야 한다는 학계의 간곡한 요청이 있다. 기정진은 순창군 복흥면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하지 않고 인접한 전라남도 장성군에 담대헌이라는 정사를 지어 학문과 강학에 힘썼다. 『납량사의(納凉私議)』, 『이통설(理通說)』, 『외필(猥筆)』 등 문집 40권 20책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가 1911년 8월 23일[제1차]과 1922년 2월[제2차], 1938년 3월[제3차], 1943년 3월[제4차]에 네 차례의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여 교육 전 영역을 망라한 종합적인 교육 개혁을 단행하였다. 식민지 정책 실현과 차별 우민화 교육으로 한민족 문화 말살을 시도하였으며, 학교마다 일본 교사가 배치되어 획일식 강제 교육을 받았다. 이러한 때에 순창 지역에는 다음과 같은 학교가 설립되어 한국과 일본 문화를 동시에 배웠다.
순창 농림 고등학교[현 순창 제일 고등학교]는 지산(芝山) 김영무(金英武)가 사재 50만 원[논 5,000두락]을 쾌척하여 설립하였으며, 1942년 5월 1일에 현재의 순창 초등학교에서 입학식을 함으로써 개교하였다. 초등 교육 기관으로는 사립 순화 학교[지금의 순창 초등학교]가 1911년 9월 11일에 개교하였고, 쌍치 공립 보통학교[쌍치 초등학교]가 1913년 5월 10일에, 동계 공립 보통학교[동계 초등학교]가 1920년 12월 1일에, 무림 보통학교[구림 초등학교]가 1922년 5월 10일에, 금과 국민학교[금과 초등학교]가 1924년 4월 21일에, 복흥 국민학교[복흥 초등학교]가 1925년 4월 10일에, 유등 공립 보통학교[유등 초등학교]가 같은 해 4월 29일에, 인계 공립 보통학교[인계 초등학교]가 1927년 6월 1일에, 팔덕 공립 보통학교[팔덕 초등학교]가 1930년 5월 12일에, 풍산 보통학교[풍산 초등학교]가 1932년 4월 16일에, 적성 보통학교[적성 초등학교]가 1935년 5월 23일에 개교하여 면마다 1개 학교씩 총 11개의 초등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현대]
8·15 광복 직후 고학력 졸업장은 취업을 보장받는 보증서로서의 가치가 충분하였다. 고등학교 이상 졸업장은 촉탁 공무원과 교사의 자격 부여가 가능하였고, 대학교 학력은 고급 수준의 취업 자격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소·돼지 등 가축과 농경지를 팔아 학비에 충당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순창군 쌍치면과 복흥면 학생들은 걸어서 당일 왕복 통학하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에 순창읍 지역에서 하숙을 하였으며, 구림면·동계면·적성면·유등면·풍산면·금과면·팔덕면·인계면에서는 하숙비 부담이 가능한 가정이 아니면 걸어서 통학하였다. 5~15㎞를 걸어서 통학하였지만 향학열이 대단하여 조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고 하며,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집안 농사일까지 도와 가며 공부를 하였다.
1. 해방 후 신설된 학교
고등학교는 1967년 3월 2일에 순창 고등학교가, 같은 해 3월 4일에 순창 여자 고등학교가, 1984년 3월 6일에 동계 고등학교가 개교하여 총 3개 학교가 설립되었다. 중학교는 1951년 8월 31일에 순창 중학교가, 1955년 4월 27일에 순창 여자 중학교가, 1965년 3월 7일에 순창 북 중학교가, 1968년 3월 2일에 동계 중학교가, 1969년 3월 15일에 복흥 중학교가, 1970년 3월 10일에 쌍치 중학교가, 같은 해 3월 14일에 금과 중학교가, 동년 3월 18일에 구림 중학교가 개교하여 총 8개 학교가 설립되었다.
초등학교는 1946년 4월 10일에 현재의 시산 초등학교가, 그해 11월 15일에 오산 초등학교가, 1949년 4월 1일에 율북 초등학교가, 동년 4월 1일에 월정 초등학교가, 1950년 4월 24일에 수동 초등학교가, 같은 해 4월 30일에 성동 초등학교가, 1951년 6월 15일에 옥천 초등학교가, 1954년 4월 1일에 답동 초등학교가, 1958년 1월 23일에 금천 분교가, 그해 3월 1일에 구미 분교가, 동년 4월 30일에 내월 초등학교가, 같은 해 5월 1일에 방산 분교가, 1961년 3월 15일에 용마 분교가, 1963년 1월 8일에 덕진 분교가, 동년 3월 1일에 금과 서 분교가, 그해 3월 2일에 영동 분교가, 같은 해 3월 7일에 동산 초등학교가, 1965년 3월 1일에 학선 분교가, 그해 11월 26일에 금국 초등학교가, 1968년 3월 1일에 풍남 초등학교가, 1970년 3월 19일에 중앙 초등학교가 개교함으로써 총 21개 학교가 설립되었다.
2. 통합·폐교된 학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1962년부터 시작되어 1996년까지 7차 계획에 성공함으로써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가 커지고 대도시에 일자리가 창출되었다. 이에 따라 자녀 교육 여건이 좋은 도시로 농촌의 인구가 빠르게 이동하면서 학생 수가 급격히 감소하여, 1991년을 분기점으로 학교 운영 기준에 미달된 학교들의 통합과 폐교가 진행되었다. 1993년 2월 28일에 순창 여자 고등학교가 제일 고등학교로 통합되어 폐교되었고, 1999년 9월 1일에는 동계 중학교가 동계 고등학교로 통합되었다. 2000년 2월 28일에는 금과 중학교가 폐교되고 학생들은 순창 중학교와 순창 북 중학교·순창 여자 중학교로 분산 배치되었다. 초등학교는 1991년을 시작으로 하여 2000년도까지 총 17개 학교가 폐교되었다.
[의의와 평가]
교육의 본질은 학생들의 소질과 잠재 능력을 계발하여 미래 삶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 부여가 목적이다. 오늘날 현대 세대는 기성세대 사고방식대로 적응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려우며, 물질이 풍족해져 가치관이 변형된 현재의 세대가 맞이할 미래는 과거와 현재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학교 폭력이 절대 방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러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2004년 1월 29일 제정]이 발효되고, 「학생 인권 조례」가 특별시·광역시·도 단위 교육감 재량으로 제정되어 학생 인권이 신장되었지만, 교사의 교편 회수로 교권이 위축되어 학생 통솔에 불균형 현상이 초래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교육의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한 교육 정책 입안 부서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으며, 순창 경찰서에는 학교 폭력 전담 부서를 신설하여 학생 탈선 방지에 대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