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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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道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정의]
1920년 전라북도 순창 지역에서 설립된 청년 단체.
[개설]
1919년 3·1 운동 이후 각 지역에서는 청년 단체들이 연이어 결성되었다.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실력 양성과 문화 향상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전라북도 15개 부군에서 1919년부터 1920년대 말까지 청년 운동 단체가 252개 정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순창 지역의 청년 단체로는 순창 청년회(淳昌靑年會), 천도교 청년회 순창 지회(天道敎靑年會淳昌支會), 동계 청년회(東溪靑年會), 여명 구락부(黎明俱樂部), 순창 형평 청년회(淳昌衡平靑年會), 순창 청년 동맹(淳昌靑年同盟), 순창 기독 면려 청년회(淳昌基督勉勵靑年會), 순창 청년 동맹 유등 지부(淳昌靑年同盟柳等支部), 순창 청년 동맹 인계 지부(淳昌靑年同盟仁溪支部),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淳昌靑年同盟金果支部)가 있었다.
[설립 목적]
순창 청년회는 1920년 6월 20일 청신한 정신을 환기하여 덕성을 소양하고 지식을 교환하며 신체를 단련한다는 목적 아래 의연금 800원을 모금하여 창립되었다.
[변천]
창립 당시 회장은 김영무(金英武)였으며 총무는 임병세(林秉洗), 서기는 신명우(申命雨)와 신학균(申學均), 회계는 이상규(李常揆)와 조학윤(曺學倫), 지육부장은 김동렬(金東烈), 덕육부장은 조일환(曺鎰煥), 체육부장은 신인휴(申仁休)였다. 1923년도 기록을 보면 회장이 이정홍(李廷鴻)으로 되어 있는데 언제 선출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간사는 김영문(金永文), 임길주(林吉周), 임병호(林秉浩)가 맡았다. 사찰부장은 이도승(李道承)이, 사찰부 간사는 국진만(鞠眞萬) 외 5명이 맡았다. 선전부장은 윤병춘(尹秉春)이 맡았고, 선전부 간사는 곽명규(郭命圭) 외 4명의 이름이 보인다. 1925년 11월 29일 혁신 총회에서 선출된 신임 위원은 서무부의 이정팔(李廷八)·최상규(崔湘圭)·성호준(成浩俊), 교양부의 선석렬(宣錫烈)·곽명규(郭命圭), 노동부의 이태환(李泰煥) 등이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활동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주요 사업은 교육 및 계몽 활동이었다. 1920년에는 아편 주사자 검거 및 치료 활동을 하였고, 1923년 2월 17일에는 3,000원의 의연금을 모아 청년 회관 건축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3월에는 금주 금연회 동맹회를 조직하여 500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였다. 1925년 12월 15일에는 청년 회관에 노동 야학을 설치하였다. 회원 이정팔(李廷八), 선석렬(宣錫烈), 신진우(申鎭雨), 곽명규(郭命圭)가 책임을 맡아 순번으로 수업을 한다고 하자 모여든 학생 수가 50여 명에 달하였다. 1926년 1월 10일부터는 선영렬(宣英烈)이 노동 야학을 전적으로 맡아 가르치기로 결정을 내리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로 접어들게 되면서 전국의 모든 청년회와 마찬가지로 순창 청년회도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1927년 5월 19일 신입 회원 30여 명을 모집하고 1. 청년 운동의 근본 방침에 관한 건, 2. 회원의 자체 교양에 관한 건, 3. 대외 교양에 관한 건, 4. 노동 운동에 관한 건, 5. 농민 운동에 관한 건, 6. 형평 운동에 관한 건, 7. 민족 운동에 관한 건, 8. 소년 운동에 관한 건, 9. 여성 운동에 관한 건 등 9가지 사항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를 통해 순창 청년회가 꼭 청년 모임이 아닌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순창 청년회는 구제 활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1927년에는 동계면에 일어난 화제 구제를 위하여 논의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지방에 있던 252개의 청년 단체 중 56개의 청년 단체가 있던 익산, 46개가 있던 전주, 33개가 있던 김제, 24개가 있던 군산, 14개가 있던 부안, 12개가 있던 임실과 금산, 고창 다음으로 10개의 청년 단체가 있던 순창에서 단연 돋보이던 것은 역시 순창 청년회였다. 강습회 및 사회 전반에 대해 심도 있는 관심을 보이며 활약했으나 일제의 탄압 가중으로 1920년대 후반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청년회는 탄생 목적부터 3·1 운동 이후 민중을 계몽하자는 의도에서 자발적으로 전국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주로 종교의 색채를 띠는 경우가 많았는데 순창 청년회의 경우에는 종교의 색채를 띠지 않고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특히 노동 운동을 중요시했는데, 이는 독립운동과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