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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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靑年同盟金果支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설립 시기/일시 | 1928년 4월 19일 -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 설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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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
성격 | 청년 동맹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에 있었던 순창정년동맹 소속 지부.
[개설]
1919년 3·1 운동 이후 각 지역에서는 청년 단체들이 연이어 결성되었다.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실력 양성과 문화 향상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전라북도 15개 부군에서 1919년부터 1920년대 말까지 청년 운동 단체가 252개 정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순창 지역의 청년 단체로는 순창 청년회(淳昌靑年會), 천도교 청년회 순창 지회(天道敎靑年會淳昌支會), 동계 청년회(東溪靑年會), 여명 구락부(黎明俱樂部), 순창 형평 청년회(淳昌衡平靑年會), 순창 청년 동맹(淳昌靑年同盟), 순창 기독 면려 청년회(淳昌基督勉勵靑年會), 순창 청년 동맹 유등 지부(淳昌靑年同盟柳等支部), 순창 청년 동맹 인계 지부(淳昌靑年同盟仁溪支部),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淳昌靑年同盟金果支部)가 있었다.
[설립 목적]
1920년대에 들어와 청년회들은 민족 자결주의에 대한 회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등에 따라 점차 사회주의적 색깔을 띠면서 청년 동맹으로 바뀌어 갔다. 1920년 6월 20일에 생성된 순창 청년회(淸道靑年會)도 1924년에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면서 순창 청년 동맹으로 변모하였다. 이어 순창 청년 동맹의 활발한 활동을 위한 면 단위의 각 지부가 결성되었는데,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는 1928년 4월 19일 오후 4시에 금동방(金洞坊)[순창군 금과면] 방축리 동사(防築里洞舍)에서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 창립 대회 결과 창설되었다. 의장에는 임동헌(林東憲)이, 서기에는 양상은(楊相殷)이 뽑혔다. 이때 순창 신간회 부회장 손각(孫角)이 의미심장한 축사를 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변천]
1929년 3월 27일에 순창 청년 동맹 조직부 이태환(李泰煥)의 개회사가 있은 후 임시 집행부로 의장에 홍성철(洪聖哲)이, 서기에 임동헌이, 사찰에 양충(虫忠)이 뽑혔다. 1928년에 이미 창립 대회를 마친 단체인데 1929년에 집행부가 임시로 선출된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는 집행 위원을 두어 활발한 활동을 하였는데, 집행 위원에는 임동헌, 홍성철, 양상은, 양상익(陽相益), 박용연(朴龍淵), 홍상의(洪尙義), 양상풍(楊相豊), 양성용(梁成龍), 김윤용(金允用), 김동관(金東官), 김봉화(金奉化) 등이 있었다. 1928년 4월 19일에는 조직 방침, 투쟁 방침, 교양 및 훈련 문제, 농총(農總), 노총(勞總), 청총(靑總)을 뜻하는 삼총 집회 해금 운동(三總集會解禁運動), 재만 동포(在滿同胞) 옹호, 신간회 지지 등을 논의하였다. 특히 이 시기 신간회 지지 문제를 논의하였음이 매우 중요하다. 1927년 2월에 신간회가 결성되고 그해 5월에 조선 사회 단체 중앙 협의회에서 조선 운동의 방향 전환론이 정당성을 획득하면서 청년 운동에서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은 한층 높아져 갔다. 이러한 일이 계기가 되어 이 시기 청년 동맹들은 신간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29년 3월 22일에는 회관 문제, 동맹 회원 모집, 지반 설치, 농민 운동, 소작 운동, 예산안, 신간회 지지, 도일 동포 저지(渡日同胞沮止), 재만 동포 옹호, 소년 운동, 미신 및 허례 타파, 동맹 대회에 대해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의의와 평가]
순창 청년 동맹 금과 지부는 순창 청년 동맹의 지부로, 1920년대 당시 면 지부까지 조직된 청년 운동의 양상을 보여 주는 역사적 자료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