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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1698
한자 旌門
영어의미역 Memorial Gate
이칭/별칭 정려(旌閭)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시대 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용국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조선 시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

[개설]

정문(旌門)은 정려(旌閭)라고도 하며, 홍문(紅門)·홍살문이라고도 한다.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표창하는 것을 정표(旌表), 그 일을 정려(旌閭)라고 했다. 충신·효자·열녀를 표창하여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운 건축물을 말한다. 대개 붉은 살을 두른 사방 한 칸 형식이나 문중 정려를 한 곳에 모아 여러 칸으로 만들거나 가옥의 출입구에 현판을 단 경우도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면서 유교 가치관을 확산시켰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유교적 윤리 규범에 따른 선행을 장려하는 일이었다. 그 가치 기준에 합당한 인물, 곧 효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을 가려 뽑아 예조에 보고하도록 하고 정문·복호(復戶)[역(役)을 면해 주는 것]·상직(賞職)·상물(賞物) 등으로 정표하였다.

때로는 면천(免賤)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기회도 주어졌다. 조선의 정표 정책은 고려의 것을 계승하여 1392년(태조 1) 7월부터 시작하여 순종 때까지 이어졌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유교적인 지배 윤리가 강화된 조선 후기에 더욱 활발하게 건립되었다.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명분을 잃었으나, 오히려 예론(禮論)을 통해 권력의 기반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양란 이후 새로운 사회적 변화 속에서 조정으로부터 충·효·열의 정문을 받는 것은 양반 신분을 유지하거나 양반으로 새롭게 편입할 수 있는 통로였다. 왜냐하면 조정에서는 충신·효자·열녀의 가문에 정문을 건립하고 복호(復戶)·관직·재물 등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표는 대단한 명예로 여길 뿐 아니라 실질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에 향촌 사회가 정려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에 빠지기도 했다. 또한 혈연관계나 학연 관계를 맺은 집단이 군현에서 정표를 요청하는 일도 잦았다. 정문은 족세 번성의 한 지표로까지 인식되었다.

[현황]

하동 지역의 정문은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없으나 19세기 정려각이 다수 잘 보존되고 있다. ‘효자 학생 정도동지려(孝子學生鄭道東之閭)’는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 한계마을 1059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효자 정도동(鄭道東)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서 1827년(순조 27)에 건립된 효자각이다. 정도동은 본관이 오천(烏川), 자가 행지(行之)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양친(兩親)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하는데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마마를 앓자 피하지 않고 간호하였고, 어머니가 돌아가자 마마에 걸린 채 신음하면서 3년 동안 보리 가루로 연명하면서 시묘 살이를 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 곡을 한 후 큰 내를 건너 아버지께도 효를 다하였다고 한다. 이를 기려서 정표한 것이다.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양공지려(贈朝奉大夫童蒙敎官梁公之閭)’는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 472번지 대정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하동군 옥종면 병천리에 거주하던 조선 철종 때의 선비 양정악이 효행이 높고 학문이 깊어 명망이 널리 알려졌다. 이에 1855년(철종 6) 양정악에게 동몽교관을 증직하고, 1867년(고종 4) 정려할 것을 명하였으며, 양정악의 아들 역시 효행이 지극하여 손자인 진사 양주신(梁柱臣)양정악 부자의 행적을 새겨 1872년(고종 7) 정려를 세웠다.

효자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염정일지려(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廉廷一碑)’는 하동군 고전면 신월리 신월마을에 위치한다. 효자 염정일(廉廷一)[1801~?]은 자가 내일(乃一), 호가 청산(靑山), 아버지가 효자 염종환이다. 이 여각(閭閣)은 염정일이 부모에게 효행에 지극하였던 사실을 기려서 1877년에 건립하였다.

효자 통정대부 증승정원좌승지 겸경연참찬관 김수직지려(孝子通政大夫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金守直之閭)’는 본관(本貫)이 용궁(龍宮), 자가 겸지(兼之)김수직(金守直)[1794~?]이 부모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여 효행을 실행한 것을 기리기 위한 여각으로 1884년에 건립되었다. 김수직은 효행으로써 고종(高宗) 을묘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通政大夫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에 증직되었고, 비문은 완산(完山) 이인명(李寅命)이 지었다.

동몽교관 금부도사 행 오수찰방 재령이번처 절부려(童蒙敎官禁府都事行獒樹察訪載寧李蕃妻 節婦閭)’는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 중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려각은 1593년 7월 왜군에게 붙잡혀 항거하다가 죽음을 당한 동몽교관 금부도사 행 오수찰방 재령 이씨 이번(李蕃)의 처 절부 숙부인 장수 황씨의 청절(淸節)을 기리기 위해서 고종 때 세웠으나 비문은 일찍이 송정(松亭) 하수일(河受一)이 지었다.

1891년(고종 28)에 건립된 조증혁, 조증록 형제의 쌍효(雙孝) 정려인 ‘효자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함안 조공증혁(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咸安趙公增赫)’과 ‘효자 증 조봉대부 동몽교관 함안 조공증록(孝子贈朝奉大夫童蒙敎官咸安趙公增祿)’은 하동군 금남면 진정리 금오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두 형제가 부모를 극진히 모셨는데 병환에 있는 어머니의 변의 맛을 보면서 병을 진단하고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깨트려 피를 입에 넣어 3일간을 연명 소생시켰다. 이를 나라에서 듣고 쌍효 정려(旌閭)를 내렸다고 한다.

기타 정려로는 ‘김사봉 처 열녀 점화 정려유허비(金士奉妻烈女占化旌閭遺虛碑)’, ‘삼효 정려비(三孝旌閭碑)’, ‘열녀 밀양손씨지려비(烈女密陽孫氏之閭碑)’, ‘효자 통훈대부 행용양위부호군 진양 정재권지려(孝子通訓大夫行龍驤衛副護軍晉陽鄭在權之閭)’, ‘윤보국 기적비(尹輔國紀蹟碑)’가 있다.

[의의]

하동 지역의 정문은 지역의 인물사·생활사 연구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비록 건립 연대가 오래되지 않았을지라도 조선 후기 지역의 사회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그것이 가진 지역학과 민속학 자료로서의 가치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김** 위의내용중 "금부도사 행 오수찰방 재령이번처 절부려(童蒙敎官禁府都事行獒樹察訪載寧李蕃妻 節婦閭)’는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 중촌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내용에서 위치가 중촌마을이 아닌 주포마을로 도로명으로는 하동군 옥종면 주포중앙길 30에 위치함으로 수정이 필요합니다.
  • 답변
  • 디지털하동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청해 주신 내용에 따라 소재지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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