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016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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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鄭一蠹書院-金昌翕- |
영어의미역 | hadong Jeong Ildu Confusian Academy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호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6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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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22년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08년 |
배경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영계마을 |
성격 | 한시|유산시 |
작가 | 김창흡(金昌翕)[1653~1722] |
[정의]
1708년 김창흡이 경상남도 하동군의 영계서원을 방문하고 읊은 오언 장편의 한시.
[개설]
「하동정일두서원(河東鄭一蠹書院)」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의 문집 『삼연집(三淵集)』 권8에 수록되어 있다. 김창흡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모신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을 방문하고 그 감회를 노래한 한시이다.
김창흡은 1708년(숙종 34) 2월 3일부터 윤3월 21일까지 한양 집을 출발하여 판교→삼척→청송→밀양→진주→하동→덕산→삼가→거창→합천→성주→울진 등을 거쳐 귀가하는 일정으로 유람하였는데, 영계서원에 들른 날은 3월 13일이었고, 「하동정일두서원」은 이때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동 일대에서의 김창흡의 유람지는 이외에도 쌍계사(雙磎寺), 불일암(佛日庵), 칠불사(七佛寺), 삼신동, 신흥사(新興寺) 등으로 나타난다.
영계서원은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영계마을에 있었던 서원으로, 1699년(숙종 25)에 정여창을 주향으로 봉안하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배향하였다.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영계마을을 ‘일두원촌(一蠹院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구성]
오언 배율의 구성법에 맞게 전개한 한시이다. 제1~제4구에서는 천지와 성악의 도움으로 하동에서 정여창과 같이 훌륭한 인재가 났음을 말하였고, 제5~제8구에서는 조선 건국 초기의 유학 진흥 정책을 배경으로 정여창이 소학의 정맥을 잇게 되었음을 밝혔다. 제9~제12구에서는 정여창의 사우 관계와 학문의 정도에 대해 언급하였고, 제13~제18구에서는 무오사화가 일어나 억울하게 희생되었지만 연산군을 탓하기보다는 하늘을 원망한다는 뜻을 말하였다.
제19~제22구에서는 비록 종성에 귀양 가서 죽었지만, 억울함도 잠시 백세 뒤에까지 이름을 떨치리라는 것을 노래하였고, 제23~제26구에서는 정여창이 오현에 들어 문묘에 배향된 것과 고향에 서원이 세워진 것을 말하였다. 제27~제30구는 자신이 영계서원을 방문하였을 때의 모습과 느낌을 묘사하였고, 제31~제34구까지는 정여창을 추모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내용]
천지기저정(天地旣儲精)[하늘과 땅이 이미 정령을 모아 두었는데]
성악혹강신(星岳或降神)[별과 산은 또 더러 신령을 내려 주었네]
득수차품령(得秀且稟靈)[빼어남을 얻고 또 신령함을 품부하니]
해후근유인(邂逅僅有人)[겨우 훌륭한 사람을 오랜 만에 만났네]
국초성배양(國初盛培養)[건국 초기에는 성대하게 인재를 길러서]
유림울빈빈(儒林蔚彬彬)[유학이 번창하여 환하게 빛이 났었네]
소학유정맥(小學有正脉)[『소학』을 공부하는 데 바른 맥이 있었으니]
선생수수진(先生授受眞)[선생이 바로 그 참된 맥을 주고받았네]
의종필재구(衣從畢齋摳)[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덕여한훤린(德與寒暄隣)[선생의 덕은 한훤당 김굉필과 이웃하였네]
마롱학칙우(磨礲學則優)[학문을 강마하여 곧 뛰어나게 되었으니]
제세하부진(際世何不辰)[말세를 맞이하여 어찌 별이 되지 않으랴?]
함서수채봉(含書雖彩鳳)[책을 익혀서 비록 채봉과 같이 되었지만]
엄몌차궁린(掩袂嗟窮麟)[소매로 가리며 세도가 다하였음을 탄식한다]
오호도천화(嗚呼滔天禍)[아아! 화란의 물결이 하늘까지 넘실거리니]
이의순도신(已矣殉道身)[끝났도다! 도를 위해 이내 몸을 바치리로다]
하주교동주(何誅喬桐主)[연산군을 주벌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유감천불인(有憾天不仁)[하늘이 어질지 않음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남금매북새(南金埋北塞)[남쪽의 훌륭한 인물이 북쪽 변방에 묻히니]
광기미장인(光氣未長堙)[빛나는 기개는 영원히 매몰되지 않으리라]
원울역잠시(寃鬱亦暫時)[억울하고 답답한 마음도 잠시일 것이니]
백세유대신(百世有大伸)[백세가 흐르는 동안 크게 신원이 될 것이다]
외외항숭배(巍巍抗崇配)[우뚝하고 높게 문묘에 배향이 되었으니]
오위성라민(五位星羅旻)[오현(五賢)의 위패는 마치 별이 벌여 있는 듯하네]
원급장구적(爰及杖屨迹)[장구(杖屨)의 자취가 있는 이곳에 이르니]
횡우계황은(黌宇啓荒垠)[배움의 터가 거친 언덕 위에 세워졌도다]
아래과경제(我來過扃除)[내가 이곳에 와서 문 앞을 지나가면서]
목격단확신(目擊丹艧新)[단청을 새롭게 칠한 것을 직접 보았네]
괴행간홍도(槐杏間紅桃)[느티나무와 은행나무 사이 붉은 복사꽃 피고]
필분읍청빈(苾芬裛靑蘋)[향내 나는 분꽃은 푸른 마름 사이에 피어 있네]
면회금옥상(緬懷金玉相)[금과 옥 같았던 모습 끊임없이 생각이 나니]
황약섭청진(怳若躡淸塵)[황홀한 것이 마치 신선 세계에 오른 듯하네]
낭영풍포시(朗詠風蒲詩)[선생의 「악양」이란 시를 낭송하노라니]
두류거심춘(頭流去尋春)[두류산에는 봄을 찾아 떠나가야 하는 것을]
이를 풀이하면, 제1~제4구는 천지와 성악이 인물을 내려 준다는 속설을 들어 하동에 큰 인물 정여창이 났음을 말하고 있다. 제15구의 ‘도천화(滔天禍)’는 무오사화를 일컫는 것이고, 제17구의 ‘교동주(喬桐主)’는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났던 연산군을 말한다. 제19구는 정여창이 무오사화 때 종성(鍾城)에 귀양 가서 죽은 사실을 말하는데, ‘남금(南金)’은 학덕이 높은 정여창을 상징한 말이다.
제23~제24구는 정여창이 문묘에 배향되고 오현으로 추앙을 받은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오위’는 문묘에 배향된 오현을 말한다. 제25~제26구는 하동에서 정여창을 추모하여 영계서원을 건립하고 제사를 모시며 후학을 가르쳤던 것을 말한다. ‘장구(杖屨)’는 고인이 머물렀던 자취를 가리키고, ‘횡우(黌宇)’는 학교 즉 서원을 말한다. 제33구의 ‘풍포시(風蒲詩)’는 정여창이 지은 「악양(岳陽)」이란 시를 말하는데, 그 첫 구에 ‘풍포범범롱경유(風蒲泛泛弄輕柔)’라는 말이 있다.
[특징]
다른 시들이 대개 오언이나 칠언으로 된 절구나 율시로 지어진 것임에 비하여, 「하동정일두서원」은 오언 배율로 된 34구의 장편시라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하동정일두서원」은 영계서원의 내력과 대강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며, 영계서원과 영계서원에 모셔진 정여창을 추모하는 김창흡의 마음이 어떠하였던가를 읽을 수 있는 한시이다.